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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첫 마음으로
 작성자 : 명선행자  2009-09-15 08:23:48   조회: 1771   
다시 첫 마음으로

새벽 도량석道場釋에 맞추어 눈 비비고 일어나 천궁天宮을 우러르니 음력 칠월 그믐 가까운 하현下弦의 송편달이 총총한 별들을 배경으로 중천에 떠있다. 절 마당을 둘러 이마받이 하듯 에워싼 검은 산들도 부스스 깨어나는 듯, 팔 벌려 심호흡으로 마시는 상큼한 새벽 공기엔 송백松柏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든다. 이 얼마 만에 마셔보는 고즈넉한 산사의 새벽 “맑음”의 맛인가!
꼭 다섯 해 전 오늘 이 절집에 들어서며 서먹하여 낯설어 하면서도 그 청정한 기운에 오감이 환희롭던 느낌이 되살아온다.
이 절에 개교한 단기출가학교 1기로 입학한 동문 법우法友들이 그 5주년 기념법회를 갖고자 여기에 다시 모인 것이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법륜전法輪殿으로 옮겨 오랜만에 죽비竹篦 소리에 맞춰 백팔배를 한 후 참선으로 이어진다. 헐떡거리며 절을 하고나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신동身動 후 심정心靜으로 신심身心을 흔들었다 가라앉힘으로써 그 동안 심경心鏡에 찌든 속진俗塵을 털고 닦아낸 듯 맑고 개운해진 마음이 된다.

그리고 아침 공양 후 전나무 숲길 포행布行에 나선다.
오대천五臺川을 옆으로 끼고 양쪽에 도열한 전나무가 하늘을 까마득히 가리운 터널처럼 뻗은 이 길은 처음 행자복 입고 깎은 머리를 들고 가 일주문 뒤 삭발기념탑에 묻고 나서 삼보일배 하며 입학을 고불告佛하던 길이다.
매일 아침 물안개 피는 계류를 따라 이 길을 걸으며 행선行禪의 헝그러운 행복을 맛보던 길이며, 대비를 들고 학익진鶴翼陣으로 늘어선 행자들이 쌓인 낙엽과 마음의 때를 함께 쓸어내던 길이기도 하다.
지금은 옛 포장을 걷어내고 황토를 깔고 다져 단장을 했는데 사람들은 맨발로 걸으며 땅기운을 받을 수도 있고 나무들이 하늘이 내리는 빗물을 그대로 뿌리로 받아 마실 수 있게 자연으로 되돌리려는 뜻이 고맙고 갸륵하다.

그런데, 길을 따라 흐르는 오대천이 너무도 소리 없이 조용하다 싶어 살펴보니 금강교金剛橋 하류 지점을 돌둑으로 가로막아 물을 가두어 그 둑 밑으로 새어 흐르는 계류의 유세流勢가 한 풀 꺾인 탓이었다.
아까 법륜전에서 참선에 들었을 때 옛날과 달리 무언가 모르게 한 구석이 빠진 듯 허전해 했더니 바로 이것이었구나!
옛날에 참선시간이면 그 정적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차악 가라앉은 마음과 공명共鳴하는 배경음악처럼 아득히 쏴아-- 하고 들리던 오대천 물소리가 주는 선기仙氣가 빠져있어 그랬던 것이다.
물을 가두어 금강연金剛淵이 금강호金剛湖(?)로 바뀌어 수위가 높아지자 낙차落差를 잃은 물은 조용히 흘러들게 되었으니, 말하자면 오대천이 인위人爲에 의해 입을 닫힌 채 묵언黙言에 들어간 것이다.

溪聲便是長廣舌(계성변시장광설)
山色豈非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
개울 물소리는 장광설(부처님 말씀)이요
산천초목은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랴

5년 전 입학하러 오던 날 금강교를 건너 절집에 들어설 때 이 금강연으로 떨어지는 쇄락한 오대천 물소리와 절을 둘러싼 울울청청鬱鬱靑靑한 산들의 위의威儀가 어우러진 선기禪氣에 문득 소동파蘇東坡의 이 게송偈頌을 떠올렸었다.
그가 조각선사照覺禪師와 더불어 밤새 무정설법無情說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의정疑情에 싸여 돌아 나오다 폭포수 아래를 지나치며 그 물소리에 문득 깨친 바 있어 지었다는 게송偈頌의 앞대목과 너무도 딱 맞아떨어지는 이 경개景槪에 매료되어 짧은 출가기간 내내 음미하며 즐겼고 졸업하고 산문을 나간 후에도 생생하게 회억回憶해 왔거늘, 오늘 침묵하는 무위無爲한 계류를 대하매 그 무상無常함이 적잖이 아쉬워진다.
그러나 떨어지면 소리 내어 울어 예는 한 자락 폭포가 되고 물길이 막히면 입 다물고 조용히 머물다 흘러가나니, 산 절로 수 절로 여법如法한 순리를 따르는 계류를 보며 이제 마음속에 탐착貪着해온 그 상相을 내려놓아야하는 것이 아니랴.

이 만남과 법회를 위해 개교로부터 5년 동안 20여 기에 걸쳐 1,000여명의 행자를 배출하고 절을 옮기신 동은東隱 은사스님도 오셨고 단기출가 후 정식출가로 이어져 스님이 되신 열 분 동문 중에서 법은, 용주 두 스님도 오셔서 삼배의 예로 맞으니 재회의 반가움은 더욱 흐뭇하다.
성속聖俗으로 갈린 지 5년 세월 후에 만나는 두 분 동문 스님을 뵈오니 속기俗氣가 싹 가신 빛나는 용모와 자리가 딱 잡힌 의연한 행보에서 그동안의 공부와 수행의 자취가 역연하다. 속으로 마음을 닦으면 겉으로 안광顔光이 빛나는 것임을 본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내려놓고 오직 한 길 깨달음의 구도에 투신한 그 분들에게 향상일로向上一路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고승대덕高僧大德 되시라고 비는 마음으로 포행 길에 한 말씀 드린다.
“두 분 스님은 우리 동문의 선두타자십니다. 꼭 홈런을 치셔야 해요.”
해놓고 보니 내 딴에 간절한 마음을 전한다고 한 그 속스러운 말의 여운이 스스로도 부끄러워 머쓱해졌다.

심검당尋劒堂에서 주지 정념正念스님의 법어法語를 들은 후 기념사진을 찍고 월정사를 하직하고 나와 중대中臺 사자암獅子庵을 거쳐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참배하고 내려와서 상원사上院寺에서 학감學監 인광印廣스님과의 다정다감한 차담茶談도 가졌다.
두 스님께서 내년에 단기출가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주간의 고급 연수과정을 연간 4회씩 개설할 계획이라는 반가운 말씀을 들으며 이 노구老軀도 받아만 주신다면 다시 한 번 도전(?)할 의욕이 발동한다. 허황한 욕심은 아닐까?

이제는 다시 산을 내려갈 시간.
상원사 절 마당에서 둘러보는 9월 중순 노염老炎의 양광陽光 아래 펼쳐진 아늑하고 포근한 오대성지五臺聖地는 아득한 원근遠近의 시야가 닿는 곳마다 그 청정한 맛이 절정이다.
한여름 숨 가쁘게 성장의 계절을 달려온 정점에서 잠시 멈춰 서서 곧 영그는 결실을 거두어들이고 조락凋落의 계절을 맞이할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산하대지山河大地를 조망하며 되돌아보매 춘풍추우春風秋雨 세월을 허송답보虛送踏步해온 지난 반 십년 내 중생衆生의 삶이 허망하기 그지없다.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 잡은 이곳에서 5년 전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잠시나마 청정한 기운을 만끽滿喫하고 반가웠던 동문 법우들과 작별을 나누고 1박2일의 짧은 재회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산문을 나선다.
기념으로 나누어 가진 기도포祈禱布에 새겨진 대로 다시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간절히 다짐을 하면서...

( 2009. 9. 13.)
2009-09-15 08: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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