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실가리' 예찬
 작성자 : 명선행자  2009-12-03 11:46:29   조회: 2108   
‘실가리’ 예찬


 아침 조간신문에 매일 시를 한수씩 싣는 <시가 있는 아침>이란 코너에서 그 제목에 눈이 번쩍 뜨이는 시를 대하며 지난 한편의 추억이 떠오른다.
몇 해 전 광주 CM(Construction Management)교육원에 강의하러 가는 길에 아내를 대동하고 갔을 때다. 밤늦게까지 야간 강의를 마친 후 아침에 일어나 조반도 거르고 길 막히기 전에 일찌감치 길을 나서기로 했다.
실은 전라도 여행의 재미 중 으뜸은 맛깔스런 남도음식의 맛을 만나는 즐거움에 있는지라 호텔 밥보다는 가는 길에 어디서 아침을 즐길 맛 집을 만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다.
장성과 백양사를 거쳐 서해고속도로를 향하여 고창읍을 지나다 마침 길가에 서있는 아저씨 한분에게 물었다.
"아저씨! 여기 어디 아침식사 할 만한 데 좀 없나요?"
"글씨 뭘 좋아하실랑가 모르겄소. 혹시 실가리 해장국을 드셔보실랑가요?"
 ‘실가리'란 말을 이때 처음 들어 보고 혹 무슨 생선 이름 아닌가 했었다.
그 사람이 가르쳐 준대로 찾아간 식당에서 실가리 해장국을 시키고 나서야 그게 무청 시래기의 전라도 사투리였음을 알게 됐고 소박하지만 구수한 장국에 깔끔한 양념과 곁들인 젓갈에 맛있는 아침을 먹었던 기억에 입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읽은 시는 바로 무청 실가리가 그 주제다.

무청 실가리
-강형철

목이 잘린 채
축 늘어진 머리카락으로
빨랫줄에 걸려 있다

언제쯤에나
시린 세상 풀어헤치고
보글보글 거품 게워내며 끓어오를까

새벽 인력시장 꽁탕 치고 돌아앉은
다리 밑 식객들의
허기진 창자에 몸 풀까

눈에 파묻힌 산사 행랑채 처마에 엮여 흰 햇살 받으며 말라가던 시래기.
끓여 먹으면 몇 년 묵은 주독酒毒, 뒤틀린 심사心事 확 풀릴 것 같았는데.
이런 소승적小乘的 자세 너머 시린 세상 먼저 풀어주는 이 시 참 대승적大乘的이네요. 12월은 김장 끝낸 허접한 배춧잎과 무청들이 세상의 시래기로 엮이는 달. 시퍼렇게 멍든 몸과 마음들 나누며 두루두루 풀어주는 달.
<이경철·문학평론가>

위쪽 지방(?)에서 쓰는 ‘우거지’란 말보다는 ‘시래기’가 더 정겹고 ‘실가리’란 남도 탯말의 어감이 백배나 더 푸근하거니와, 한 시인의 토속적 감성이 우려내는 따듯한 마음이 담긴 짧은 시 한수에 그 깊은 맛이 짙게 묻어나고 그 깊은 속마음을 잘 짚어 드러내는 시평詩評 또한 못지않게 따듯해서 막바지 김장철 깊어지는 겨울에 드는 섣달 초하루 아침에 훈훈한 기운이 세상을 덮는 듯하다.

흔히 무만 먹고 잘라 버려지기 쉬운 무청을 엮어서 말려 두었다가 저녁이면 시래기죽으로 한 끼 주린 배를 채우던 시절엔 시래기는 요긴한 ‘양식’이 되었었다.
요즘처럼 먹거리가 지천으로 흘러넘치게 풍성하여 맛집을 찾아다니며 달고 시고 맵고 짠 강력한 자극의 미각을 쫓는 세상에 어쩌다 시래기나물이나 시래기 된장국이라도 만나면 순하고 덤덤한 대로 옛날 입맛을 떠올려 반기게 된다.
얕은 조미료 맛에 절고 동물성 쪽으로 기우는 식성食性이 사람들의 미각뿐 아니라 심성心性마저 인스턴트화 하는 우리들 주변에서 메마른 속을 풀어주고 마음마저 부드럽게 하는 실가리 같은 식물성 먹거리들을 더 많이 찾아내어 즐길 일이 아닌가싶다.

"Men are what they eat"란 말은 깊이 새겨볼 진리가 아니랴. 수렵․채취에서 목축․농경사회로 변천하며 이어져온 인류가 그 먹고사는 주식과 그것을 취득하는 수단과 방법에 따라 문명과 문화 컨텐츠는 물론 인간의 성정性情과 행동방식까지 바뀌며 흘러온 것이 인간의 역사다.
하다못해 초식草食인 소에게 사람이 먹지 못할 허접한 제 고기를 섞어 먹여 비육肥肉을 서둔 결과 광우병狂牛病을 일으키고 그 우육牛肉 먹은 미친 소의 고기를 다시 사람이 먹고 미치는 일로 벌여진 광폭狂暴한 소동까지 겪으며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걸 보면서 우리네 섭생攝生방식과 식문화를 반성하고 실가리 같은 자연이 주는 정갈한 먹거리를 귀히 아끼며 더 많이 즐겨 먹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2009. 12. 1.)
2009-12-03 11:46:29
125.xxx.xxx.141


작성자 :  비밀번호 : 


번호
제 목
작성자
날짜
조회
49
  [모집] 좋은생각사람들이 행복한동행 청춘 스토리텔러를 모집합니다   박헤나   2013-07-05   2328
48
    자유칼럼 필진 여러분께 알려드리지요   임철순   2013-07-06   2528
47
  오월의 香宴   명선행자   2010-06-08   2294
46
  <시> 小雪   명선행자   2010-03-10   1911
45
  漢詩 감상 數題   명선행자   2010-02-28   1854
44
  告天   명선행자   2010-02-12   1626
43
  맑은 공기가 최고의 보약이라고 합니다.   나그네   2010-01-05   1394
42
  '실가리' 예찬   명선행자   2009-12-03   2108
41
  내 뒷모습을 보며   명선행자   2009-10-01   1674
40
  다시 첫 마음으로   명선행자   2009-09-15   1741
39
  유기농업에서 유기자원과 피복작물 중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일까?   정만철   2009-09-02   1586
38
  유기농업에서의 액비이용   정만철   2009-08-26   1919
37
  농경지 유기물 시용과 토양미생물의 변화   정만철   2009-08-19   2945
36
  플라보노이드의 역할   정만철   2009-08-12   3313
35
  작물잔사는 폐기물이 아닌 보물?   정만철   2009-08-04   1946
34
  한나절 나들이 길에   명선행자   2009-07-28   1890
33
  미국의 텃밭가꾸기 (1)   정만철   2009-07-22   2063
32
  지역발전의 미래를 여는 유기농업   정만철   2009-07-15   1566
31
  식물도 아스피린이 필요하다 ?   정만철   2009-07-07   1958
30
    재미있는 글입니다.   김영환   2009-08-04   1510
제목 내용 제목+내용 이름
 1 | 2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