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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절 나들이 길에
 작성자 : 명선행자  2009-07-28 05:24:03   조회: 1910   
한나절 나들이 길에
-자운서원紫雲書院, 화석정花石亭 그리고 자유로自由路


좀 관심을 기우리면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가 볼만한 곳들이 널려 있기 마련이다. 내가 사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화정동花井洞; 꽃우물 마을은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북쪽으로 막 벗어난 곳으로 부근에 서오릉, 서삼릉이 가까이 있어 발걸음을 자주 하거니와 좀더 발을 뻗치면 능묘 세곳이 한데 모셔진 공, 순, 영릉에도 쉽게 닿을 수있다.
파주의 자운서원은 율곡 기념관과 아울러 신사임당을 비롯한 율곡선생 일족의 묘가 있어 성역화 되어 있고 그 옆에 연수원 시설을 두루 갖추고 울창한 송림의 뒷산을 한 바퀴 도는 등산겸 산책로까지 잘 마련되어 있다.
사실 이곳에 발걸음을 자주 하게 된 데는 여기에서 가까운 법원읍 교외에 막국수와 초계탕으로 유명한 맛집 ‘초계 가든’을 알고부터인데, 맛있게 점심을 마친 후 내친 김에 자운서원을 둘러보고 뒷산 등산로도 한 바퀴 돌고 나오군 한다. 말하자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미식(?)후의 뒷풀이 나들이처럼 되었다.
율곡 기념관에 들러 그녀의 초충도草蟲圖 등 그림과 초서 병풍과 자수 등의 유품들을 감상하며 시詩 서書 화畵와 자수에 두루 뛰어난 신사임당의 그 고아高雅 소담素淡한 자취에 흠뻑 취한다.
그는 19세에 서울 덕수 이씨가에 출가하였으나 곧 부친이 사망하자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로 홀어머니를 돌보며 친정에서 많이 살았고 율곡도 외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38세에 서울로 떠나올 때 대관령에서 친정 쪽을 뒤돌아 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身向長安獨去情 신향장안독거정
回首北村時一望 회수북촌시일망
白雲飛下暮山靑 백운비하모산청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무는 푸른 산을 날아 내리네

제題하여 踰大關嶺望親庭(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외로이 홀로 친정 어머니를 남겨 두고 한양으로 떠나는 딸의 애틋한 정이 철철 넘쳐 흘러 읽으면서 가슴이 젖는다. 특히 白雲飛下暮山靑의 결구結句는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절창絶唱이다.
이렇게 떠나온 그가 한양 시댁에 머물 때 두고 온 친정을 그리며 쓴 思親이라는 시를 보자.

千里家山萬疊峰 천리가산만첩봉
歸心長在夢魂中 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雙輪月 한송정반쌍륜월
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鷗恒聚散 사상백구항취산
波頭魚艇各西東 파두어정각서동
何時重踏臨瀛路 하시중답임영로
更着班衣膝下縫 경착반의슬하봉

내 고향은 산 첩첩 천 리라지만
자나 깨나 꿈 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물 가엔 쌍으로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모래톱에 갈매기들 모였다 흩어지고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가리니
언제나 강릉 길 다시 밞아 가
색동 옷 입고 그 무릎 아래 바느질 할꼬

앞의 慈親鶴髮같은 어머니에 대한 직설적 언급 대신 그의 고향 친정 강릉 경포대 언저리의 정경 묘사와 다시 돌아가고픈 향사鄕思를 에둘러 읊조리다 更着班衣膝下縫의 결구에 다다라서야 언외言外의 간접화법으로 그 무릎 밑의 바느질에 빗대어 사친思親의 정을 퉁겨 올리는 전결轉結의 멋이 한결 더 은근하고 간장을 녹이는 듯 하지 아니한가.

자운서원을 나와 이왕 나선 김에 북쪽으로 더 발길을 옮겨 굽이쳐 휘돌아 흐르는 임진강을 내려다 보는 언덕위 느틔나무 고목이 그늘을 드리운 단아한 정자 화석정에 이르면 율곡이 여덟살 때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화석정에 부친 시를 새겨 놓은 시비詩碑를 만난다.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 산토고윤월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숲 속 정자에 가을 이미 깊어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물은 멀리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 받아 붉구나

산 위엔 둥근 달 외로이 떠 오르고
강은 만리를 부는 바람 머금었는데
변방의 기러기 어디로 날아 가는고
울음 소리 잦아드네 저무는 구름 속

깊고 심오한 맛은 덜해도 천진한 어린이의 풍경화 스케치를 보는 듯한 이 서경敍景에서 어머니 신사임당의 훈도로 7세에 이미 사서四書를 비롯한 여러 경전을 깨우쳤다는 그의 천재적 시재詩才에 경탄의 무릎을 치게 한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산 위에 뜬 어린 율곡의 ‘화석정 孤輪月’과 동해 바다에 비쳐 물 아래 위로 뜬 사임당의 ‘한송정 雙輪月’에서 달을 그리는 시어詩語의 닮음을 보면서 율곡의 시재란 가랑비에 옷 젖듯 어미로부터 훈습薰習된 시심의 흔적이 아니고 무엇이랴 싶어 자못 놀랍다.
16세에 어머니 사임당이 48세로 급서하자 이 곳 자운산紫雲山에서 시묘侍墓한 뒤 금강산에 들어가 한 해 동안 불교를 공부하고 나왔다는 율곡을 보면 이들 모자간의 도타운 정을 추찰推察할 수 있거니와 큰 어미 그늘에서 나온 큰 사람의 자취에서 우리가 새끼들을 어이 기르고 어미를 어찌 받들어야 할지 돌아보며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돌아오는 길은 시원한 강바람이라도 쏘여 보자고 자유로에 들어선다.
한 참을 달리다가 차창 밖으로 흐르는 임진강 건너 벌거벗은 민둥산의 북한 땅과 강둑을 따라 구불구불 둘러쳐진 긴 긴 철조망의 사행蛇行이 시야에 들어오자 잠시 침묵하고 누워있는 옛 선인들의 자취에 빠져 그 향기에 취하며 헌거로웠던 마음은 한갓 백일몽이었던 듯, 지금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산 역사인 이 시대의 냉엄한 현실로 돌아오게 한다.
강토가 갈리고 혈육이 찢겨져 끊긴 채 지내온지 60여 성상을 넘어 동족상잔의 상흔을 털고 아물릴 때도 되었건만 주변 정세를 현명하게 타고 넘을 형안과 통 큰 배짱으로 양쪽을 아울러 내지 못한 채 소아적小我的 동상이몽으로 헛 바퀴만 돌리고 있는 역사의 역리逆理가 언제까지 이렇게 흘러가야 할지 암담한 생각에 가슴이 무겁다.
이런 역사의 배리背理를 알리 없는 남‧북의 한수漢水, 임진臨津 무심한 두 강물은 한 줄기로 합수하여 처연한 노을이 곱게 지는 아득한 서천西天을 향하여 도도히 흘러 가건만 허리가 동강난 조선 땅 백성들의 역사의 강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묻고 싶어진다.
삽상颯爽한 가을 날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소찬素餐 막국수 점심의 식도락 겸 역사탐방의 한나절 짧은 나들이 길은 이렇게 침잠沈潛 속에 맑음 뒤 흐림으로 가라앉는다.
2009-07-28 05: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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