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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뒷모습을 보며
 작성자 : 명선행자  2009-10-01 07:17:21   조회: 1675   
내 뒷모습을 보며


얼마 전에 월정사 단기출가 1기 동문 법회에 다녀온 뒤에 함께했던 법우法友로부터 그가 찍은 사진 몇 장을 메일로 보내왔다. 젊은(?) 사람들 틈에 낀 백발노구白髮老軀의 내 모습이 별로 어울려 뵈지는 않지만 5년 만의 반가웠던 재회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사진이 고마웠다.
그런데 그중 한 장의 사진을 쉽게 놓지를 못하고 한참을 들고 많은 생각을 하며 보게 한다. 그것은 넓은 절 마당을 혼자서 그림자를 끌고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스냅으로 찍어놓은 것이었다.
사진이란 대개 카메라를 바로 보고 더러는 “김치-” 하며 억지로라도 웃는 모습에다 손가락으로 V자도 그리며 있는 멋, 없는 멋을 한껏 부리며 찍기가 보통인데 느닷없이 나도 모르게 찍힌 내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치부를 남에게 드러내 보인 것 같아 영 부끄럽기도 하고 마치 떡이라도 훔쳐 먹다 들킨 것처럼 당혹스러운 기분이기도 하다.

제 모습을 보고자 거울 앞에 서 본들 언제나 앞모습일 뿐 여간해서 뒷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마다 눈에 보이는 앞모습만을 열심히 다듬고 가꾸며 잘 보이게 하려고 모든 애를 다 쓰기 마련이다.
그뿐 아니라 안이비설眼耳鼻舌이 모두 안면에 붙어있어 마음속에 이는 오욕칠정五欲七情을 낱낱이 표출하기 마련이니 그 앞의 겉모양으로 미루어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헤아려 살아가며 때때로 겉만 보고 속을 잘못 헛짚는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 우리네 중생들 삶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남들만 보고 나는 못보는 뒷모습에선 훨씬 더 꾸밈없이 정직하고 가감 없이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람’이 드러난다.

내가 좋아해서 꽤 즐겨 부르는 좀 오래된 유행가 노래가 있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망설이는 나에게
굿바이 하며 내미는 손 검은 장갑 낀 손
할 말은 많아도 아무 말 못하고
돌아서는 내 모양을 저 달은 웃으리.

그 노래의 압권壓卷은 결구結句의 “돌아서는 내 모양”에 있지 않을까한다. 수줍어 망설이다 아무 말 못하고 돌아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보고 서있었을 검은 장갑의 시선이 놓치지 않았을 것이며 이 짧았던 서먹한 데이트로 시작된 로맨스의 결말은 그의 망막을 통해 심안心眼에 투영된 그녀의 뒷모습의 여운 여하에 따라 매듭지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축 처진 어깨, 굽은 등줄기, 주저앉은 목덜미, 정수리를 훤히 드러낸 성긴 백발의 뒤통수하며 어기적거리는 팔자걸음이 그대로 포착된 내 뒷모습에서 멸망해가는 육신의 흔적이 낯설지만 여실如實한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딱 걸렸구나.’ 하는 마음의 잔잔한 파문이기도 하고 작은 개안開眼이기도 하다.
언필칭 ‘나이 불혹不惑이면 제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거니와, 그렇다면 ‘고희古稀를 넘으면 제 뒷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때’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장의 스냅사진이 언젠가 차생의 인연을 접고 종생終生에 이르러 어떤 뒷모습을 남겨두고 떠나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며 여생을 살아가자는 때늦은 자각의 기회를 가져다준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은 그가 시해弑害되기 1년 전인 1948년 73세 되던 해에 당신이 평소 좌우명처럼 지녀온 서산대사의 경구警句를 휘호揮毫하여 유묵遺墨으로 남기셨음을 본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므로.

설야행雪野行에 빗대어 뒷사람들에게 어지러운 뒷모습을 남기지 말 것을 엄중히 경책하는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 선생은 평생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임시정부를 이끌고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고초를 겪고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애석하게도 흉탄에 쓰러져 갔지만 난세를 사는 우리 모두가 본받을 잊을 수 없는 뒷모습을 남겨놓았다.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餘韻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적은 길이여.

청마靑馬의 시 <춘신春信>의 종련終聯이다.
작은 묏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가고 그 나무 가지 잠간 흔들리다 멈춘다. 그리고는 무슨 일 있었더냐싶게 이 작은 사건은 공적空寂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새와 나무 사이 잠시 주고받은 청아淸雅한 인연의 길은 이렇듯 끝없이 그리고 적적寂寂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랴.
좋은 뒷모습을 남기려 억지로 애를 쓰기보단 인연 따라 살다가 이처럼 차라리 깨끗이 지워놓고 감이 오히려 청정하지 않으리.
(2009. 9.)
2009-10-01 07:17:21
125.xxx.xxx.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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