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 사회학과 77학번 이야기를 하려니, 솔직히 조심스럽습니다. 자랑질(?)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누군가는 한 번쯤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습니다. 

77학번은 고교평준화 첫 세대로, 연합고사를 본 후 뺑뺑이로 고등학교를 배정받은 원년 멤버입니다. 저는 무학여고에 배정받았는데, 그때 선배들이 저희를 후배로 인정하지 않았답니다. 서러웠던 고등학교 시절을 마치고 이화여대 문리대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습지요. 당시는 여고 3학년 교실에서 10명 가운데 1명 정도가 겨우 대학에 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화여대는 1973년부터 요즘 교육부에서 강권하는 무전공에 가까운 계열별 모집을 시행 중이었고, 특유한 방식의 논술시험을 치렀습니다. 문리대 인문사회계열로 입학한 77학번 신입생은 3학년 올라가서야 전공학과를 결정했는데, 그때 꼭 40명이 사회학과에 이름을 올렸답니다. (참고로 영문과는 380명, 철학과는 4명, 기독교학과는 0명을 기록했습니다. 이미 뼈아픈 실패의 경험이 있는 제도를 아무런 보완책 없이 다시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교육부의 배짱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한데 사회학과 77학번 40명 동기 중에 무려 16명이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가운데 13명이 무더기로 교수가 되었답니다. 임용된 대학도 다채로워서 2명이 모교 교수가 되는 행운을 누렸고, 강릉대, 성공회대, 아주대, 중앙대, 충남대, 한림대 등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과 퀸’(학과의 유일한 여자 교수를 칭하는 은어)의 왕관을 쓰는 영광을 누렸답니다. 심지어 일본 릿쿄대 교수 자리도 꿰찼고, 미국 대학의 철학과 교수도 나왔습니다. 

한 학년에서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교수를 배출한 사례는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한동안은 사회학회에 가면 동기동창회를 하곤 했답니다. 언젠가 동기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누가 사회학자 아니랄까 봐, 우리가 걸어온 길을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77학번은 실상 시대의 희생자였습니다. 3학년 가을 학기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대학이 문을 닫았고, 4학년 때는 ‘광주사태’(지금은 광주민주화항쟁)로 5월 18일부터 11월 중순까지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사회학도라는데 배운 건 하나도 없고, 졸업은 해야 한다니 부끄럽고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우리들 마음속엔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입학하던 해 이화여대에 처음으로 개설되었던 여성학 과목의 영향도 있었을 테고, ‘엄마처럼 살진 않겠다.’는 의식도 꿈틀거리고 있었건만, 야속하게도 우리가 졸업하던 해인 1981년 한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일촉즉발 위기로 치닫던 정치 상황으로 인해 사회 분위기는 뒤숭숭하기만 했습니다. 더더욱 ‘군필자’만 받아주겠노라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 동기들이 선택한 것이 대학원 진학이었던 겁니다. 졸업과 동시에 한꺼번에 12명이 이대 대학원에 원서를 냈고, 서울대로, 연대로, 외국 대학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났습니다. ‘일단 들어섰더니 본전 생각이 나서 그만둘 수가 없어 여기까지 왔노라.’는 한 친구의 까칠한 고백이 우리의 솔직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77학번이 머리 싸매고 공부만 했느냐? 물론 아닙니다. 연애도 요란하게 남부럽지 않게 했답니다. 한 친구가 연애를 시작하면 동기생 40명이 함께 연애모드로 진입했으니까요. 잘 된다 싶으면 덩달아 흥분하고 헤어지는가 싶으면 서로 아파하며 뭣도 모른 채 훈수를 두던 시절의 기억이 선하네요. 이제 사위 며느리 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 유독 부모 반대 무릅쓰고 결혼식장에 들어갔던 친구들 얼굴이 떠오릅니다. 부모가 금족령을 내리자 애인 만나려고 요리학원에 등록했던 짠한 사연의 주인공도 있고, 첫 미팅에서 만난 파트너와 8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부모의 승낙을 받아낸 순정파도 있답니다. 2시간 정도는 예사롭게 기다려주던 남자 친구를 남편 만들기까지, 흘린 눈물이 강을 이룬다던 친구도 있고, 학교 앞 빠리다방을 아지트 삼아 (학생)운동과 연애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친구도 있었지요.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 멋쟁이들은 머리 희끗희끗한 지금도 여전히 멋스러워서, 남대문시장에서 산 옷을 걸쳐도 명품 부럽지 않네요. 바람 소리가 너무 좋아 도저히 강의실에 들어갈 수 없어 대강당 계단 앞에서 발길을 돌리던 친구는, 영화판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지금도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뜬금없이 단편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면서 BTS 찐팬이라 ‘커밍아웃’한 친구도 있고, 강남 대형교회 여선교회 회장으로 제2의 커리어(?)를 개척한 친구도 있네요. 

학창 시절 골수 마르크시스트였든, 신랑감 물색에 여념 없었든, 할머니가 된 지금은 모두들 적당히 주책 부리며 허심탄회하게 잘 어울립니다. 그 교수 친구들이 지난 2월 29일 모두 퇴임을 했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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