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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라 설날의 부모님

2011년 02월 02일 (수) 02:15:26

황경춘

거의 전국으로 확산된 구제역, 혹한에 뒤이어 찾아온 눈, 그리고 예년에 없이 긴 연휴 -- 이런 것들이 설 풍속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구제역 청정지역으로의 귀성을 자숙하라는 정부 권유에 연휴를 이용한 해외여행이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소, 돼지, 닭 등 가축 수백만 마리가 전염병으로 살처분(殺處分) 당하고 제수를 준비하는 아낙네들은 물가고에 비명을 올리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설날을 맞이하였습니다.

조상을 위한 차례와 성묘 그리고 떨어져 사는 부모나 친척과의 상봉으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 설날입니다. 그러나 80대도 중반을 넘어선 저의 경우, 설 명절만 되면 언제나 떠올리는 것이 옛날 시골에서 부모님과 함께 일제 말엽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즐겁게 지낸 갖가지 추억입니다. 이 감상적인 감회는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만 갑니다.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양력이 도입된 것은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여 그 날을 공휴일로 공포한 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신정(新正)은 단발령과 함께 일본의 압력으로 공포된 것이라 하여 국민의 불만을 많이 샀다고 합니다.

초기의 무단정책이 조선민족의 계속적인 저항에 부딪히자 한때 유화정책으로 돌아섰던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다시 철권정책으로 돌아서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식량 공출과 노동력 징발 등 경제착취 뿐 아니라 조선민족의 문화까지 말살하려는 악랄한 정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소위 내선일체ㆍ민족협화(內鮮一體民族協和)란 명목 아래 국어 상용(일본말 常用), 창씨개명, 신사(神社)참배, 백의착용 금지, 양력 명절 준수 등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강요했습니다. 우리보다 약 20 년 전에 양력을 도입한 일본은 설, 칠석, 추석 외에 심지어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 날까지도 양력으로 쇠고 있습니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는 학교나 행정기관을 통해 강요하니 어쩔 수 없었지만, 우리 어릴 적에는 5일장 날에 흰 두루마기에 상투를 틀어올린 시골노인을 장터에서 만날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럴 때 물총을 든 경찰관이 흰 두루마기를 향해 까만 먹물을 쏘는 진풍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백의민족의 상징인 흰 한복도 차츰 거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우리 아버지 세대가 끝내 슬기롭게 지켜낸 것이 우리말과 설날 등 우리 전통 민속 문화였습니다. 일제 감시의 눈을 피해 저항할 길이 있는 한 우리 조상은 우리 것을 지켜온 것입니다.

일제의 학제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일률적으로 3학기 제도였습니다. 4월에 시작하는 학년은 7월 21일부터 40일 동안 여름방학에 들어가고, 2학기말 겨울방학은 신정을 사이에 둔 2주일 뿐 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설날은 언제나 3학기가 시작한 두세 주일 뒤에 오게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학교에서 야단을 쳐도 설날에는 지각하는 학생이 많았고 배짱 좋게 아예 결석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설날의 분위기는 역시 달랐습니다.

우리 시골은 빈촌이어서 그런지, 세뱃돈을 주는 풍습은 없었습니다. 대신 아이들은 집안 형편에 따라 갖가지 설 선물을 받았습니다.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설날 직전 5일장은 보통 때와는 달리 무척 붐볐습니다. 당시 제일 손쉬운 선물이 고무신이었습니다. 좀 여유 있는 집안에서는 천으로 된 맵시 있는 운동화나 털장갑 같은 것도 아이들에게 새로 사주었습니다. 그래서 설날에는 새 양말에 새 신발을 신고 등교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해마다 신정 때에 아동용 일기책을 사주신 저희 선친은 설날에는 잡지나 동화책을 살 용돈을 주셨습니다. 조선인 담임선생의 권유로 4학년쯤부터 일본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작문(作文)시간이 5학년부터 있어 군청이나 세무서 등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 입선한 적이 있었던 것도 이렇게 일찍 시작한 일기쓰기 습관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집에서 약 2km 떨어진 읍내에 떡방앗간이 있었던 기억이 있으나 설날 음식은 어머님이 이웃 도움을 받아 전부 집에서 만들었습니다. 양조장 술 구하기도 힘들어 술도 집에서 몰래 빚어 썼습니다. 조청과 강정 유과 등을 만드는 날엔 다섯 살 아래 동생과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던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우리 시골 떡국에는 만두 대신 조개류를 썼습니다.

과일은 옆 마당에 있는 감나무와 밤나무에서 수확한 것 이외에 배는 장날에 살 수 있었지만 요즘같이 겨울에도 구할 수 있는 딸기나 수박 같은 것은 하우스 재배가 없었던 시대이니 물론 시장에도 없었습니다. 제주도 귤 재배가 시작되기 전이니 귤은 일본에서 수입하였으며, 바나나와 더불어 설상 차림에 귀중한 과일이었습니다. 윷놀이와 널뛰기도 설날에 빠질 수 없는 놀이였으며 대보름날에는 뜻도 잘 모르며 ‘강강수월래’ 놀이를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이 선창하는 구수한 노랫가락에 우리는 후렴만 따라 불렀습니다.

시골집에서의 이러한 설날 추억은 1938년에 제가 진주중학교에 입학하여 하숙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일단 중단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식량사정이 더욱 어려워져 설날이 되면 마음씨 고운 하숙집 아주머니가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기는 했지만 시골집에서와 같은 설상은 물론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고 광복의 기쁨과 혼란 속에 맞이한 1946년의 첫 설날은 참으로 감격적이었습니다. 물자의 결핍과 사회의 불안은 계속되었지만 이제는 적어도 우리 설을 규제하는 사람은 없어 처음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명절을 즐겼습니다.

일본군에 끌려갔다 무사히 돌아온 저는 읍내 미군부대 통역으로 난생 처음으로 봉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미군부대에서 당시로서는 귀한 양주와 초콜릿 등 과자류를 구해 어머님이 준비한 푸짐한 설음식과 더불어 처음으로 마음껏 ‘우리’ 설날을 즐겼습니다. 징 꽹과리 등 쇠로 된 농악기는 전시에 공출로 빼앗겨 남아 있지 않았지만 장고 북등 그 밖의 도구로 설 분위기 조성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의 시골 설날 마지막 추억입니다. 저는 그해 고향을 떠나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오게 되어 10여 년 뒤 부모님을 서울로 모시게 될 때까지 안타깝게도 다시는 시골집 설차례에 참여하지 못 하는 불효를 범했습니다. 나이 들어 설날을 맞이하며 자식들과 나누는 기쁨 한 구석을 차지하는 이 아쉬움은 내내 씻을 길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