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홈 > 뉴스 > 연재칼럼 | 허영섭 동서남북

설 연휴까지 덮쳐버린 구제역

2011년 01월 31일 (월) 00:50:15

허영섭

구제역이 멈칫하면서도 계속 퍼져가고 있습니다. 설 연휴를 앞두고는 어지간히 가라앉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역시 부질없는 기대였습니다. 그동안 매몰 처분된 소, 돼지가 어느덧 300만 마리에 이르렀다니 어디 상상이나 했던 일입니까.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이번 사태를 '50년만의 최악의 사태'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거기에 조류 인플루엔자까지 겹쳐서 극성을 부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 연휴를 맞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오히려 착잡한 까닭입니다. 심란하고 침울하기조차 합니다.

고향의 부모님들께서는 신경이 더욱 예민해지신 것 같기도 합니다. 도회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에게 시골에 내려오지 말도록 미리부터 신신당부를 내리기도 했답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질수록 구제역도 그만큼 빠르게 퍼질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겠지요. 아니, 어쩌면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가축들로 인해 상심한 마음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배려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시골 동네마다 구제역 전염을 막으려고 온통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합니다. 외양간에 바깥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합판을 덧대고 가마니를 두르는 것은 물론 부득이한 손님의 방문이라도 받게 되면 신발에 묻은 흙까지 털어내도록 한 다음에야 안마당에 들인다는 것입니다. 사료도 직접 포대째 실어와서는 혹시 묻어 있을 바이러스를 털어내기 위해 반드시 하루, 이틀을 묵혔다가 먹인다고 하지요.

사정이 이러하니 제 자식이라고 해도 외지에서 생활하는 경우라면 이웃의 축산농가들을 생각해서라도 얼싸안고 맞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닐 것입니다. 모처럼 고향을 방문한 자식의 입장에서도 이웃을 돌아다니며 동네 어른들께 푸근한 마음으로 안부 인사를 드리기가 쉽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의 구제역 방역초소에서부터 썰렁한 느낌을 가져야 하는 것은 또 아닐까요.

순박하기만 하던 시골 어른들의 마음이 이렇게 황폐해진 것입니다. 한 식구처럼 돌보던 가축들이 졸지에 떼죽음으로 몰리는 모습을 목격하고도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근육이완제에 의해 안락사를 당하는 어미소가 무릎을 꺾고 쓰러지는 순간까지 송아지에게 꿋꿋이 젖을 물렸다는 얘기를 들어보셨겠지요. 어린 돼지들은 꿀꿀대며 포크레인에 떠밀려 구덩이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모두가 자기 죄라 원망하며 억장이 무너져라 자신들의 가슴을 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국내에서 몇 차례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이번에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것은 무엇보다 대응체계의 미흡함 때문이었습니다. 구제역 판정을 받기까지 초동단계에서부터 해당 농장주나 지자체가 안일하게 대처했고, 판정을 받고 나서도 중앙정부의 잘못된 판단이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번 사태가 어디까지나 ‘인재(人災)’와 ‘관재(官災)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고집스럽게 살처분 방침을 밀어붙인 것은 중대한 판단착오였습니다. 연간 20억원 규모에 불과한 돼지고기 수출을 유지하려고 구제역 청정국이라는 지위에 집착하다가 빚어진 결과입니다. 물론 예방적 살처분으로 구제역을 진정시킨 전례가 없지 않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어차피 구제역이 통제의 한계를 넘어선 시점에서는 살처분을 중단하고 예방백신 접종으로 전환하는 적극적인 판단이 필요했지만, 그 시점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축산업의 기반까지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고 전국 곳곳이 소, 돼지의 피로 얼룩졌습니다. 그 사체가 썩어 완전히 분해되기까지 환경훼손, 지하수 오염 등 또 다른 재앙을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방역을 맡은 지자체 공무원들은 또 그들대로 엄동설한의 날씨 속에 과로를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한층 깊어지고 있습니다.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인해 얻은 것은 없고 온통 잃은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책임을 축산농민들에게 돌리는 듯한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초동단계에서 해당 농가들이 건성으로 대처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고 정부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매뉴얼대로 진행했는데 매뉴얼에 문제가 있었다”는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발언까지 들려오고 있습니다.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가 갈수록 빨라짐으로써 과거의 매뉴얼이 지금에 맞지 않는지도 모르고 거기에 매달렸다면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을망정 ‘매뉴얼 장관’임을 내세우고 싶었던 것일까요.

물론 축산농가들에게도 문제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앞으로 구제역 재발방지를 위해 지역별로 상시 방역조직을 갖추고 축산농가에 대해 꾸준한 예방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그런 때문이겠지요. 이번처럼 구제역 증상이 처음 발견되고도 미적거리는 바람에 확정 판정을 받기까지 시일이 지체되어 화근을 키우는 일은 다시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보상금을 더 많이 받아내려고 살처분 마릿수를 부풀려 신고하는 농민들이 없지 않다는 얘기도 듣기가 거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애당초 백신접종에 대해서는 대비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예 비축된 백신이 없었으려니와 백신접종 비용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백신 매뉴얼’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명박 대통령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다음에야 백신접종으로 방침이 바뀌었다니, 이것이 우리 축산농정의 현주소라는 점에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여권 내부에서조차 책임추궁론이 제기됐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결국 늦어지긴 했지만 유정복 장관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중대한 정책실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다면 어느 누가 기꺼이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겠습니까. 살처분된 소, 돼지야 짐승이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가축들이 산 채로 파묻히면서 신음처럼 내뱉은 마지막 울음소리에 밤잠을 뒤척이는 농민들의 한숨소리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보상과 방역에 들어가는 2조5,000억원 규모의 막대한 비용도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구제역 사태를 종식시킨 다음에 물러나겠다"는 단서입니다. 유 장관이 진정으로 책임을 느꼈다면 그대로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공직자로서 합당한 처신입니다. 더구나 지금으로서는 구제역이 언제 가라앉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조만간 예상되는 개각으로 떠밀려 물러나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명예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이명박 대통령도 내일(2월 1일)로 예정된 신년 방송좌담회를 통해 구제역 사태와 관련해 국민들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흔쾌한 입장 표명이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