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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현판을 다시 생각하며

2011년 01월 25일 (화) 00:49:11

임종건

서울시가 새해 들어 문화적 가치가 빛나는 사업계획을 내놨습니다. ‘한글 마루지’ 사업입니다. ‘마루지’가 영어의 랜드마크에 들어맞는 우리말이라고 하니 그런 낯선 우리말을 찾아내 사업제목으로 단 것부터가 가상합니다.

계획에 따르면 서울시는 광화문에서 세종로 4거리에 이르는 주변 지역 47만㎡ (14만2,000평)를 한글마루지로 조성하는데 여기에는 세종로공원 8,868㎡ (2,680평)에 들어서는 한글 11,172마당 외에 세종생가복원, 주시경 기념공원, 한글사랑방 설치 등이 포함됩니다.

11,172는 한글 자모 24자로 만들 수 있는 글자의 수로, 공모를 통해 선정된 시민으로 하여금 돌판에 글자를 새기게 한 다음 그 돌판을 마당에 깐다는 것입니다. 또 외국관광객에게 한글 이름을 써서 표구(表具)해 주기, 한글디자인을 살리는 도로시설·표지판 등의 공공디자인 및 픽토그램 공모전도 열 계획이라고 합니다.

광화문 광장에 세종의 동상이 세워졌고, 광장 지하에 한글전시관이 들어선 것과 함께 매우 뜻 깊고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별없는 외래어 사용과 인터넷 사용자들로 인해 한글의 상처가 깊어가고 있는 때라 서울시의 한글 마루지 사업은 서울시민은 물론 많은 국민들의 박수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광화문의 현판을 다시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손수 ‘광화문’이라고 한글 현판을 쓴 것에 대해 미흡한 정권의 정통성을 호도하려는 민족주의적 몸짓이라는 폄하가 있지만 당시 한글전용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치열한 사회적인 논란을 상기할 때 나름대로 시대정신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광화문은 1990년 1차 경복궁 복원계획이 세워질 때 왜곡된 위치와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 철거 복원이 결정됐는데 1차계획의 마지막 사업으로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5년부터 해체 및 복원작업이 본격화했습니다. 당시 문화재청장은 “광화문의 현판에서 박정희의 살기를 느낀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유홍준씨였습니다. 학창시절 반정부 운동 경력의 소유자로서 충분히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체는 대체로 가늘어서 예리한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거기에서 ‘살기’를 느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고 정치적인 의미 부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가 박정희의 한글 현판을 떼어내고 한자 현판으로 바꿔달기로 한 것이 문화나 역사의 관점보다 정치의 관점에서 이뤄졌다는 의심을 사게 된 배경입니다.

유씨는 최근 어느 일간신문에의 기고를 통해 박정희의 한글 현판이 ‘문화능력의 반영’이라면서 광화문이 복원(復元)이 아니라 중건(重建)이었다면 한글 현판을 유지했을 것처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문화재 당국은 옛 사진에서 한자 현판을 찾아냈으나 쓴 사람이 대원군 시절 궁궐의 공사감독관인 임태영으로 직급이 낮고 서체가 옹졸하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왕조 임금 중에서 명필로 인정되는 정조임금의 글씨로 집자(集字)한 ‘門化光’ 현판을 만들어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집자 현판이 원형복원이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사진 속의 글자를 디지털 방식으로 모양을 내서 만든 것이 현재 걸려있는 ‘門化光’ 현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광화문’ 현판은 한자 현판과 운필(運筆)의 방향이 정반대인 것에서 나타나듯이 이제 우리 사회에서 보편화한 한글 서법(書法)에 따른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아마도 경복궁이 세종대왕께서 궁 안의 집현전에서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이고, 정궁의 정문에 한글 현판을 거는 것의 상징성을 누구보다 깊이 생각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문화재 복원의 대원칙은 원형 복원입니다. 그러나 광화문의 한글 현판도 엄연히 국민 모두가 반세기 가까이 공유했던 우리의 현대사의 일부분입니다. 그 속에 담긴 시대정신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단순한 과거의 복원 차원을 넘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진정한 의미의 복원이 아니겠습니까.

역대 어느 정부보다 유별나게 자주를 내세웠던 노무현 정부가 이 점을 외면한 것은 아쉬운 점입니다. 학계나 한글 단체들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복원공사 기간 내내 말이 없다가 한자 현판이 걸리기 코앞에 와서야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시늉만 했습니다. 버스 지난 뒤에 손드는 꼴이었습니다.

나는 서울시의 ‘한글 마루지’사업이 광화문의 한글 현판에 대해 국민적인 논의를 제대로 불러 일으켜, 민족 정체성의 정수(精髓)인 한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청회도 열고, 여론조사도 해보고, 필요하다면 국민투표도 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래서 한글 현판이냐, 한자 현판이냐를 가리고, 한글이면 박정희 현판을 다시 달 것인지 아니면 당대의 서예가에게 위촉할 것인지를 결정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훈민정음 자체(字體)를 집자하자는 안이나, 아예 광화문의 우리말 뜻을 살려 ‘빛 될 문’으로 하자는 안도 따져봤으면 합니다.

새로 내건 ‘門化光’ 현판이 제작한 지 석 달도 안 돼 균열이 가서 다시 제작 중이라는데, 나는 그것이 광화문 앞에 앉아 계신 세종대왕께서 그런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