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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기억을 찾다
2019년 02월 20일 (수) 00:20:49 홍승철

고향이 어디인지 질문을 받으면 불편했습니다. 그때마다 구차스럽게 설명해야 했으니까요.

“함경도 태생인 부모님은 해방이 되던 해에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져 피란하다가 부여에서 얼마간 거주하던 중 나를 낳았고 두 달 뒤에 부산의 영도로 옮겨 갔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 여름방학에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지금은 부산에 가도 아는 이 하나 없습니다. 조카 뻘 삼 남매가 있긴 한데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러니 내 고향이 어디라고 말하기 곤란하군요. 아니, 고향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부산에 갈 일이 있으면 내가 살았던 영도의 집들을 둘러보곤 했습니다. 살던 동네의 문패에 생각나는 이름이 아직도 있는지 살펴 보아도 아는 이름은 없는 곳입니다. 그래도 찾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입니다. 수십 년 지났는데도 변하지 않은 곳이 많은 사실도 마음을 잡아당기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새로 들어선 집들이 있어도 옛 생각을 떠올리곤 합니다. “저긴 자유당 때 정치인 이시영의 집이었지.” “저긴 라이파이를 보던 만화 가게 자리인데.” “1학년 때 한 반이던 정희네 2층 양옥은 없어지고 길이 나 버렸네.”

여덟 집을 거치며 이사 다녔습니다. 청학동의 집은 임시로 한두 달 정도만 살아서 그런지 위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나머지 집들은 동네를 알거나 정확히 자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세 곳의 집은 도로 확장으로 사라졌으며 두 집은 헐리고 새로 지어졌습니다. 남은 집은 둘인데 동네만 알 뿐 어느 집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갓난아이일 때부터 살던 봉래동의 집입니다. 동네 전체가 거의 옛 모습 그대로 있으니 그 속에 내가 살던 집도 남아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당시에 지었을 피란민의 집들이 오랜 세월 원형을 유지한 채 있으니 애틋한 마음도 듭니다. 실은 그 옆에 들어선 홈플러스(전에는 아람마트라는 지역 브랜드)가 행여 우리 집이 있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살 때의 기억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나이가 얼마큼 들었을 때 어머니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봉래동 집에 살 때 부모님과 같이 기차를 타고 노량진이란 곳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한쪽으로 가로수가 늘어선 언덕길을 올라 어느 집에 갔는데…” 어머니는 그 기억에 놀라며 사촌형님 결혼식 때였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결혼 기념사진을 찾아서 단기로 적힌 연도를 서기로 환산해 보니 세 살 때였습니다. 

몇 해 전 영도를 방문했을 때는 둘러본 이야기를 블로그에 기록했습니다. 몇 차례로 나누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재작년에 그 글 중 하나에 놀라운 댓글이 달렸습니다.

“봉래동에 살았습니다. 사진에 저희 외할머니 집이 찍혀 있어서 어머니와 이모님께 말하니 아직도 승철이 집이라고 부르는 집이 있다며 반가워하셨습니다. 연락할 수 있는지 물어보셔서 글을 올립니다. 연락처를 가르쳐 드릴 테니 괜찮으시면 연락 주세요.”

동네 모습 사진을 찍는다는 게 어쩌다 내 집 근처였으며, 사진 속 집의 가족이 내 글을 읽고 사진을 보게 되다니! 가슴이 뛰었습니다. 알려 준 두 개의 번호 중 하나에 전화를 했습니다. 댓글을 쓴 이의 어머니였습니다. 진심으로 반갑게 전화를 받아 주었습니다. 댓글의 댓글이 이어졌습니다.

“오늘 어머님과 통화했습니다. 시기에 대해 여쭈어 보니 기억하시는 그 이름이 제가 맞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제가 살던 집이 그 근처 어디에 지금도 있다 하니 놀랍습니다.”

“방금 전해 들었습니다. 부산에 오시면 연락 주시라 하네요.”

“부산 갈 기회 되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서너 살 때까지 살던 곳인데 제 이름으로 그 집이 불린다는 데에 놀랐습니다.”

통화까지 하고 나니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십 수 년 동안 한 해에 한두 번씩 부산에 출장 가던 일이 공교롭게도 그때 이후로 끝나 버렸습니다. 애태우다가 새해 들어 결심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전화로 만날 약속을 하고 열차를 탔습니다. 동네 길가에 미리 나와 맞아 주신 그분을 따라가 집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의 주인은 얼마 전에 근처 아파트로 이사하여 빈 집이 되었다 합니다. 주인에게 부탁을 해 보았지만 열쇠는 받지 못했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래도 부엌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아궁이는 없애고 바닥을 방 높이와 같게 돋우어 입식 부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엌과 방 사이에 없던 벽을 만든 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 벽이 없을 때 부엌에 서서 돌아가시기 전의 할아버지께서 윗목에 정좌하신 모습을 쳐다본 기억이 한 장의 사진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다락으로 통하는 사다리는 없어졌습니다. 연락이 끊긴 삼 남매 중 장녀인 동갑내기 연순이가 굴러떨어진 사다리여서 기억이 또렷합니다. 다락의 존재는 밖에서 보이는 부엌문 위의 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억에 없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부엌을 사이에 두고 다른 한쪽에 출입문이 따로 있는 방이 더 있었습니다. 일자 집입니다. 어쨌든 기억 속의 집이 분명합니다. 지붕은 근래에 새로 한 것이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동네를 잠시 둘러본 다음 좀 떨어진 곳의 커피집으로 가서 이야기를 더 나누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났으며 주인도 여러 차례 바뀐 집이 어떻게 지금도 승철이 집으로 불리는지 물었습니다. 명쾌한 답은 듣지 못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고만 했습니다. 대화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막내 여동생이라 했습니다. 전화 통화에서 동생은 언니에게 ‘승철’이를 만났는지 확인하고, 고향에 찾아온 사람이니 대접 잘 해서 보내라고 당부했다는군요. 전화기를 건네받아 여동생과 인사했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그분이 말하기를 동생도 승철이 집, 경숙이 집(나의 누님 이름)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나보다 두어 살 위였지만 동생의 나이는 나보다 여러 살 아래였습니다. 그 동생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친구처럼 부른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대화하다 보니 아들이 댓글에서 알려준 또 하나의 전화번호가 아들의 이모, 즉 나와 전화 목소리만으로 인사한 동생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모의 번호까지 댓글로 알려준 이유가 금세 이해되었습니다. 애초에 예정한 대로 전날(일요일) 왔으면 동생과 같이 만났을 거라고도 했습니다. 시간을 짧게 예정했기에 저녁을 같이하진 못했습니다. 다음 기회에 찾아와서 내가 대접하겠다고 말하고는 헤어졌습니다. 

아직도 여운이 있는 방문이었습니다. 세 살 때의 집을 찾은 일이어서 그렇습니다. 살면서 거의 처음 대하는 나에게 배려와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들을 만났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한편으로는 오래된 숙제를 해낸 기분입니다. 이제는 누가 물으면 고향은 영도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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