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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버러에서 만난 시인 오웬과 BREXIT
2018년 08월 17일 (금) 00:25:30 허찬국

지난주 영국을 다녀왔습니다. 평소 이맘때면 20°C대 중반 정도의 날씨를 보인다는데 이를 훌쩍 넘어 날씨가 더웠던 런던에서 학회 일정을 마치고 동해안 중북부의 노스요크셔 주의 해안가에 위치한 스카버러를 다녀왔습니다. 런던에서 기차로 2시간 반 정도 북쪽에 위치한 이곳은 날씨가 훨씬 시원하고 쾌청해 가만있어도 호사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사이먼과 카평클의 노래 스카버러 페어(Scarborough Fair)에 등장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인구 6만을 조금 넘는 바닷가 작은 도시인데 여름철 휴가객이 꽤 몰리는 역사가 오래된 곳이었습니다. 하기야 영국은 가는 곳마다 역사가 깊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겠지요. 바닷가 가까이 온천이 있어 로마제국도 영국을 지배하던 때부터 휴양시설을 만들어서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제일 가까운 유럽 대륙의 프랑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유럽 대륙의 역사적 부침(浮沈)과 사건의 생채기를 여기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잠시 영국이 직면한 큰 고민거리를 먼저 짚어 봅니다. 영국 정부는 2016년 유럽연합(EU) 탈퇴를 묻는 소위 BREXIT 국민투표의 결과에 따라 2019년 봄을 시한으로 EU 탈퇴를 통보했고, 현재는 매우 복잡한 결별 협상을 진행하고 있지요. 하지만 아직까지 합의는커녕 EU와의 큰 의견차로 협상이 난항입니다. 수십 년 한 살림하던 유럽 국가들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라 상당히 불안합니다. 경제계는 한목소리로 BREXIT가 부정적이라는 의견입니다. 처음 국민투표가 선동가들에게 속아 객기부린 것이니 EU 탈퇴에 대해 다시 투표하자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첫 번째 대륙의 일이 영향을 미친 흔적은 1차 대전 때 스카버러가 독일 해군 함정으로부터 포격을 받았던 역사입니다. 1차와 2차 세계대전은 애초 EU, 또는 그 전신이 만들어지게 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1차 대전은 유럽이 가장 치열한 전쟁터였습니다. 1차 대전이 시작된 1914년 말 독일 해군이 동북부 해안의 영국 주요시설에 접근해 포격을 가했는데, 이때 애꿎게 휴양지인 스카버러도 포격을 받아 어린이를 포함한 일가족 등 18명이 사망합니다. 이 사건은 그 후 영국 내에서 독일에 대한 전의를 고취하는 데 널리 활용됩니다.

두 번째 흔적은 스카버러의 아담한 박물관에서 마주친 1차 대전 참전 중 요절한 시인 윌프레드 오웬(1893-1918)展이었습니다. 오래전에 들어 막연히 알고 있던 시인인데 그곳에서 본 전시회를 통해 더 알게 되었습니다.

1차 대전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크지만 무기체계가 훨씬 더 발전했음에도 19세기식 전술을 적용하여 엄청난 전상자를 낳았던 무모한 전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과 대치했던 서부전선의 참호전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당시 교전국들의 마주보는 참호는 북쪽 벨기에 해안선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프랑스 동부 지역을 관통하여 스위스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대치 상황은 기본적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교착상태를 깨려는 공격으로 사상자만 양산하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눈비로 참호 안은 진흙탕인 때가 많았고, 참호 밖은 철조망과 포격으로 파인 큰 구덩이 천지인 곳에서 독가스 공격을 견디어가며 긴 시간을 보내야 했던 병사들은 공격한다고 참호에서 나오면 기관총의 총알받이로 떼로 죽어 나갔습니다. 채 수습하지 못한 참호 밖 시신은 쥐에 뜯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이 1916년 7월 1일에 시작하여 11월 중순까지 이어진 솜(Somme) 전투였는데 약 30km 정도의 프랑스 솜江 구간에서 독일 방어선을 공격한 영국군의 첫날 사망자 18,000명을 포함 58,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대치 구도가 대동소이한 상태로 전투가 끝났을 때 사상자 수는 영국과 연방국 약 42만, 프랑스 20만, 그리고 독일 47만~60만 명에 달했습니다.

초급장교 오웬의 소속 부대는 1916년 말 프랑스로 보내져 참호전 지옥에 투입됩니다. 그곳에서 온갖 참상을 목격하고 포격에 구사일생 살아남지만 참상을 겪은 탓에 이제는 외상후스트레스 장애로 잘 알려진 포격충격(shell shock)을 심하게 겪으며 이듬해 봄에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병원으로 후송됩니다. 그곳에서 이미 반전성향의 시로 유명해진 시그프리드 서순(1886~1967)을 만나 교류하는 것을 계기로 본인도 본격적인 詩作을 시작합니다. 오웬은 목격했던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웬의 묘비석 사진과 20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기를 기념하여 종전일에 런던타워 앞 잔디밭에 진열되었던 888,246개의 사기로 된 양귀비꽃의 하나. 이 숫자는 영국 및 영연방에서 참전하여 사망한 병사 수

퇴원 후 그는 스카버러에 배치되어 한동안 근무하게 되는데 필자가 그곳에서 오웬 특별전을 보게 된 것도 스카버러와 시인의 인연 때문인 것이지요. 영국 내 근무 기간에 틈나는 대로 시작에 몰두하고 다른 문인, 지식인들과도 교류합니다. 그의 시가 다른 문인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평판이 높아졌습니다. 지인들이 오웬이 계속 후방 근무를 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나 1918년 초가을 다시 프랑스 전선으로 투입됩니다. 그리고 종전 1주일 전인 11월 4일 도강(渡江) 작전 중 전사합니다. 그의 시신은 프랑스 오스(Ors)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가축 떼처럼 죽어가는 이들에게 어떤 장례의 종소리가 울리는가?”로 시작하는 'Anthem for Doomed Youth'를 비롯해서 많은 반전 성향의 시들을 유작으로 남겼습니다.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은 1960년대 초 작곡한 전쟁 진혼곡(War Requiem)에서 오웬의 시 9편을 가사로 사용했습니다. 독일 작가 에리히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도 오웬이 겪었던 서부전선의 참상을 독일 측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일의 재발을 막자는 정치인들의 암묵적 합의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통합 노력이 급진전되어 EU에까지 이르게 된 매우 근본적 동인(動因)입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스카버러에서 이런 과거의 비극을 되새기며 선동가들의 외국인 혐오, 경제적 혜택이 크다는 꼬임에 EU 탈퇴에 찬성한 영국 유권자들의 결정이 새삼 유감스러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영국이 BREXIT를 재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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