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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몽유능묘기(續 夢遊陵墓記)
방석순 2009년 07월 20일 (월) 02:30:29
500여 년 동안 27대를 이어간 조선왕조의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새롭게 등재되었습니다. 구리시에 있는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서, 경복궁으로부터 종묘에 이르는 거리에서 이를 기념하고 자축하는 행사도 성대히 베풀어졌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세계유산을 모두 9건 보유하게 됐다고 합니다.

옛것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일은 새것을 만들어 내는 일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거기서 선인들의 발자취를 읽고 뜻을 새기며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왕릉 40기 가운데는 25명의 왕과 그들의 왕비(계비 포함), 그리고 사도세자(思悼世子)처럼 생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후손들에 의해 추숭(追崇)된 네 사람의 추존왕과 비의 무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삼촌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됐던 단종은 무덤도 노산묘로 불리다가 숙종 때 왕으로 복위되면서 장릉(莊陵)으로 추봉(追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자나 깨나 단종이 유배를 간 영월 땅만 바라보다 죽은 단종비 정순왕후 무덤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 시가(媤家)의 남양주 묘역에 묻혔다가 단종과 함께 복위되며 무덤도 사릉(思陵)으로 승격돼 이번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랐습니다.

반면 왕으로 권세를 누리다가 왕위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무덤도 세계문화유산에 끼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10대왕 연산군(燕山君)과 15대왕 광해군(光海君)의 묘입니다. 1대왕 태조의 원비(元妃) 신의왕후와 2대왕 정종 및 정안왕후의 능은 개성에 있어 관리상의 문제 때문인지 제외되었습니다.

벗을 사랑하고 맛과 멋을 즐기고… 그렇게 풍류로 한 세상을 살다 간 백파(伯坡) 홍성유(洪性裕) 선생의 묘(자유칼럼 2008년 12월 29일자)가 앉은 도봉산 남쪽 자락. 거기서 십여 분쯤 걸어 내려오면 실개천과 나란히 달리는 방학로 찻길 옆에 작은 안내판이 하나 붙어있습니다. ‘연산군묘 오른쪽으로 150m'.

평지 민가 속에 무슨 왕족의 분묘가 있으랴 의아해 하며 개천을 건넜더니 7백년 됐다는 엄청나게 큰 은행나무를 마주하고 동그마니 솟아오른 작은 언덕에 연산군 일가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太定太世文端世睿成燕)… 그러니까 조선왕조의 꼭 열 번째 왕이었습니다. 왕위에 올랐으되 왕의 신분으로 죽지 못해 그의 무덤은 능(陵이) 아니라 묘(墓)로 불립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의 번듯한 묏자리는 못 되어도 그런대로 왕자의 격에 맞춘 분묘라 합니다. 뒤로는 야트막한 곡장(曲墻)이 둘려있고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이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죽어서라도 부부로 지내고자 애쓴 부인 신씨(愼氏)의 청이 받아들여져 멀리 강화도 교동(喬洞)의 유배지에서 죽은 후 시신이 옮겨져 부인, 딸, 사위와 함께 가족묘를 이룬 것입니다. 묘역에는 처자식의 무덤이 한 데 옹기종기 엎드려 혼이나마 외로움은 잊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의 등극과 몰락, 그 부침에 따라 그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尹氏)의 무덤도 능이 되었다 묘가 되었다, 춤을 추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아버지 성종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숨진 어머니를 한스럽게 여겨 연산군은 재위 시절 윤씨의 묘를 회릉(懷陵)으로 추숭했습니다. 그러나 이복동생 중종의 반정 이후 다시 회묘(懷墓)로 강등되고 만 것입니다.

능과 묘를 오간 건 윤씨 무덤만이 아닙니다. 연산군의 처(폐비 신씨) 조카인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端敬王后)도 반정공신들의 성화에 못 이겨 폐출된 후 죽어서 신씨 묘역에 묻혔다가 근 200년이 지난 영조 때에야 복위되면서 온릉(溫陵)이라는 능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누이 덕에 좌의정까지 올랐던 신수근(愼守勤)은 매부 연산군을 지키느냐, 사위 중종을 옹립하느냐, 기막힌 기로에 섰다가 결국은 형제가 몰살당하고 누이와 딸이 폐출되는 최악의 운을 맞았던 것입니다.

이성계가 기운이 다한 왕건의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지 100년 만에 알려진 역사에 의하면 더할 나위 없는 망나니요 폭군인 연산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폭정과 주지육림으로 지낸 그의 재위 12년 동안 100년 왕업도 헛되이 나라의 기초는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왕 아래 세상 정보에 감감한 소인배들이 사리사욕과 질투와 당쟁으로 날을 지새우다가 조선은 나라도 아닌 나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연산군이 신권과의 싸움에서 왕권을 회복하려다 옥좌를 빼앗긴 불행한 왕이었다는 논리를 펴는 이도 없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조선 사회에서 그가 재위에 있었던 짧은 기간 비로소 왕의 권위가 살아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차례 사화(士禍)로 숱한 신하들을 죽였으며 경연을 폐하고 채홍사를 풀어 전국의 기녀들을 불러들이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방탕과 황음(荒淫)으로 지새운 사실은 덮을 수 없는 실덕이요 패덕임이 분명합니다.

연산군 이후 100년 만에 왜구에 의해 강토가 유린됐고 다시 30여년 후에는 호란을 겪었습니다. 그토록 오욕의 역사가 되풀이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중종반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성혁명에 의해서 나라가 바뀌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미 기운이 다한 왕조를 붙들어 세우느라 기력을 탕진할 까닭이 없으니까요. 조선은 이후 제대로 왕조다운 빛을 보이지 못하고 결국 일제에게 통째로 먹히고 말았습니다.

이번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40기의 조선 왕릉은 500년에 걸친 왕조의 역사와 전통, 사상이 밴 독특한 조형의 문화공간으로, 인류가 지켜야 할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보존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앞으로 그 보존, 관리에는 유네스코의 지원도 따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번 등재에서 제외된 연산군 묘와 광해군 묘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오히려 왕위에서 몰려나게 된 그들의 특이한 이력과 역사에서 더 많은 것을 찾고 배우고 교훈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묘역 또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왕릉 40기 못지않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소중히 관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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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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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99.XXX.XXX.163)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또한 제외된 두 왕의 묘역도 등재된 왕릉들처럼 잘 관리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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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1 11: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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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자 (68.XXX.XXX.58)
야-아, 굉장한 소식을 접하게 되니 마음이 뿌듯합니다. 귀한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왕조의 왕릉 40기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새롭게 등재 되었다니 굉장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말로 기쁜 일입니다. 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답변달기
2009-07-20 11: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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