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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길
김수종 2009년 07월 01일 (수) 01:28:37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중략)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중략)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안도현의 시 ‘바닷가 우체국’에서는 언제나 인간적인 그리움이 배어납니다.

장마가 제주도에 상륙하던 6월 22일 일행 20여명과 함께 ‘제주올레’를 걸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대학생에서 60대 후반의 의사 선생님까지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벼랑길, 종려숲길, 선인장 길, 자갈길, 모랫길, 바윗길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여섯 시간을 안개가 짙게 낀 바닷가를 걸었고, 일행은 안도현처럼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걷는 게 즐거웠습니다.

우리가 걷는 코스는 서귀포시 강정천이 흐르는 풍림콘도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풍림콘도는 두 개의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바닷가 벼랑에 위치하고 있어 경치가 아름다웠습니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곳이라 그런지, 낚시꾼이 바위에 많이 몰리고 갈매기도 많았습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벼랑 위 소나무 숲에 정자가 하나 서 있습니다. 그 정자의 이름은 ‘바닷가 우체국’입니다. 물론 직원이 없는 무인 우체국입니다. 정자 가운데 테이블이 있고 나무로 만든 빨간 우체통이 있습니다. 정자에 매달아 놓은 스피커에서 조용한 음악이 흐릅니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올레를 걷는 사람들이 수시로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바닷가 우체국에 들러 이마의 땀을 닦으며 엽서에 사연을 써서 우체통에 넣고는 걸음을 계속합니다. 몇 사람이 같이 걷기도 하지만 대개는 혼자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배낭을 지고 있고 등산화를 신고 있지만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과는 거동이 다릅니다. 긴장이 아니라 여유가 느껴져서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 바닷가 우체국에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씨가 우리를 보러 잠깐 나타났습니다. 제주해녀처럼 까맣게 탄 얼굴엔 여유로움이 넘쳤습니다. 제주올레가 너무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고, 그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만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맨손으로 개인이 만든 관광코스가 이렇게 유명했던 적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처음에 올레코스를 열 때 걷는 사람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의 모습을 보았기에 그의 마음을 알 만합니다.

그가 공들여 열어놓은 10여개의 코스에 올레꾼들이 끊임없이 걷고 있습니다. 이벤트가 아니라 혼자 사색하며, 식구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대화를 하며 걷습니다. 내가 아는 40대 여성은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자 제일 먼저 “보름동안 올레길이나 걸으면서 생각해보겠다.”며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물론 단체로 걷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과 홍콩 등 동남아의 상류층 사람들이 제주올레를 걷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루 수천명 혹은 수만명이 제주도를 걷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대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올레길은 나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니니 여러분들이 참여해서 세계에서 가장 멋있는 길을 만드십시오.”
간간이 미국사람도 빨간 바닷가 우체국을 들러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주도 관광에 큰 변화가 보입니다. 제주도만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제주올레길에 이어 지리산둘레길이 뚫리고 있습니다. 강화도에도 걷는 길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백두대간 트레킹 코스가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이 차를 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로 연결되는 것이 언젠가 이뤄질지도 모릅니다. 콘크리트구조물과 자동차의 노예상태에서 얼마간이라도 해방되어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걸을 수 있는 행복한 여유가 많은 사람에게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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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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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24)
제주 올레를 세상에 알린 서명숙씨야말로 김이경씨가 소개했던 채링크로스 84번지의 작가 헬렌 한프의 성공을 닮은 *유명인사* 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고, 이름을 얻으려는 헛된 성공 과는 전혀 다른, 진정 아름다운 것을 위해 기울인 노력들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고 한 개인의 귀한 성공을 이룬, 흔치않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꼭 한 번 제주올레에 참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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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2 12:44:28
0 0
서울사람 (211.XXX.XXX.47)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니 저도 제주 올레를 걷고 싶습니다.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라는 표현을 보니
선생님도 안도현 씨 못지 않은 시인이십니다!
답변달기
2009-07-02 11:07:28
0 0
김창식 (222.XXX.XXX.44)
안도현 님의 시는 쉬우면서도 우리들의 감성을 건드립니다.
누구의 마음 속에도 '바닷가의 우체국' 하나쯤 있으리라 여겨지는군요.
답변달기
2009-07-01 08:39:32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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