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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고 싶다면 -『채링크로스 84번지』
김이경 2009년 06월 23일 (화) 09:00:24
어릴 적에는 권선징악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야심만만한 한 교수님이 총장직에 오르는 걸 보고 그 오랜 믿음을 버렸습니다. 대신 간절히 원하면 -옳든 그르든-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의 그릇과 성품은 그 직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장담컨대 그분만큼 오래 한결같이 총장직을 소망한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분이 총장이 되어서 기쁘다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적이 없지만, 그럼 뭐합니까? 우리가 뒤에서 흉을 보든 말든 그분은 이른바 명문대학의 총장이고 우리는 아무 성공도 하지 못한 일개 필부일 뿐인데요. 그래서 억울하면 성공하라고들 하는 게 아니겠어요.

정말이지 저도 성공하고 싶습니다. 성공의 철학적인 의미 같은 건 다 떠나서 그냥 세속적으로 성공하는 거 말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떨치고 영향력도 행사하고 사회 지도층 인사로 한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성공에만 매달려 악착같이 사는 건 영 자신이 없습니다. 성공도 좋지만 제 성정을 버리면서 재미없는 인생을 살 수는 없으니까요.

『채링크로스 84번지』는 그런 제게 반가운 희망을 준 책입니다. 성공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악착 떨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고마운 책이지요. 150쪽에 불과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 연극으로 TV드라마로 만들어져 성공을 거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뜻밖의 인연이 빚은 아름다운 운명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지요.

책 제목에 나오는 채링크로스는 런던의 유명한 서점 거리입니다. 1949년 10월, 뉴욕에 사는 작가 헬렌 한프는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는 헌책방 마크스 서점에 책을 주문합니다. 이 책은 그때부터 1969년까지 20년간 주고받은 거래주문서 비슷한 편지들을 모은 것입니다. 얇은 책에 짧은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글자도 많지 않고 어려울 것도 없어서 정말 단숨에 읽힐 것 같은 책입니다. 하지만 중간 중간 책에서 고개를 들고 괜히 어슬렁거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한 호흡에 읽기에는 행간이 참 긴 책입니다.

헬렌 한프는 방송대본도 쓰고 어린이 책도 쓰고 잡지에 기고도 하면서 정말 닥치는 대로 글을 썼지만,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이는 아니었습니다. 편지에서 묘사한 대로라면 그녀는 작고 볼품없는 아파트에서 행여 일거리가 떨어질까 걱정하며 혼자 살았던 듯합니다. 커피를 마시며 권당 5달러 이하의 고서를 읽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자 호사였으니, 어찌 보면 쓸쓸한 인생이었지요.

하지만 그녀는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습니다. 책을 주문하고 발송하는 지극히 건조한 관계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는 따뜻한 사이로 변한 것은 그녀의 유머 덕분이지요. “친애하는 부인”이라고 쓴 답장을 받은 뒤 그녀는 “부인이라는 호칭이 이쪽에서 사용하는 그런 뜻이 아니었으면 좋겠군요.”라며 슬쩍 자신이 미혼임을 밝힙니다. 사적인 이야기를 톡톡 털어내는 그녀만의 독특한 어법에 고지식한 영국의 서점 직원도 어느덧 무장해제 되고 맙니다.

“친애하는 헬렌, 이제 당신 호칭에서 ‘양’을 빼버릴 때가 되었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쌀쌀맞은 사람은 아니지만 제가 보내는 편지의 사본이 사무용 서류철로 묶이는 까닭에 공식적인 호칭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952년 2월 14일”
“제 대본엔 늘 예술적인 배경이 등장하죠.…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희귀 서적상에 관한 것을 하나 써볼까 하는데 어떠세요? 그러면 당신은 살인자가 되고 싶으세요, 아니면 시체가 되고 싶으세요? -1952년 3월 3일”
“친애하는 헬렌(이제 내가 더는 서류철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보입니까?) -1952년 4월 17일”

독신의 여자와 비슷한 연배의 유부남 사이에 이토록 자주 편지가 오갔다면 그게 아무리 책을 사고파는 일이었대도 뭔가 ‘썸씽’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84번가의 극비문서’라는 이상야릇한 제목을 달고 나온 것도 이런 인지상정을 지나치게 의식한 탓일 겁니다. 사실 영화에서는 안소니 홉킨스와 앤 밴크로프트라는 두 걸출한 배우가, 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를 ‘썸씽’을 참으로 절묘하게 연기해서 보는 이를 설레게 합니다. 책은 그보다 더 담백하지만 독자의 상상까지 원천봉쇄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끈끈한 ‘썸씽’보다 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따스한 인정입니다. 헬렌 한프는 전쟁 직후 식량난을 겪는 영국인들을 위해 달걀이며 햄 따위를 챙겨 서점으로 보냅니다. 일면식도 없는 미국의 독자가 보낸 음식들에 서점 직원들은 감격합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쓴 감사 카드와 한프가 쓴 답장을 읽으면 미소가 번지고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책과 사람의 소통도 아름답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새삼스런 깨달음에 살아갈 힘이 생기고, 착하게 살고 싶어집니다.

책에 실린 편지들에는 런던에 한번 놀러오라는 말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한프도 올해엔 가겠다고 여러 번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런던에도, 채링크로스의 헌책방에도 가지 못합니다. 그녀만큼 책에 연연해하지 않던 친구들은 런던도 가고 책방에도 찾아가건만 정작 그녀는 오매불망 마음으로 그릴 뿐입니다. 돈이 없는 탓이지요. 유머가 풍부한 그녀에게도 이런 삶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닙니다.

1969년 어느 날, 중년의 끄트머리에 선 한프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가 절망에 빠집니다. “나는 실패한 희곡 작가였다. 나는 아무데도 가지 못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이튿날 채링크로스 84번지에서 마지막 편지가 도착합니다. 한프가 20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내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 순간입니다. 그리고 무명의 작가 헬렌 한프가 성공을 거머쥔 것도 그 순간부터입니다.

책은 전 세계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영화, 연극, 드라마로 만들어져 장기 공연되었으며, 사방에서 팬레터가 쏟아졌습니다. 한프는 모처럼 찾아온 성공을 그녀다운 방식으로 알뜰하게 누립니다. 전 세계에서 날아온 편지에 답장을 쓰느라 인세를 몽땅 우표 값으로 쓰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성공을 하기 전이나 한 뒤에나 한결같은 그녀의 심성, 그 때문에 이 작은 책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는 것이겠지요.

오로지 성공하기 위해 안달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성공하고 싶은지를 잊은 성공은, 본인은 몰라도 타인에게 큰 고역이 됩니다. 남들이 배 아파하는 성공은 부끄러운 것이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진짜 성공은 성실히 착하게 살아서 남과 더불어 얻은 성공이라는 것, 그것만 가슴에 새겨도 세상 살기가 이리 팍팍하지는 않을 것 같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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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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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211.XXX.XXX.116)
이준기 선생님, 부족한 작품을 찾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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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5 23: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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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기 (211.XXX.XXX.38)
김이경 선생님,
선생님의 소설집 "순례자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넓고도 깊은 책 세상 순례 덕에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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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4 22: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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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115)
지도능력 없는 지도층 인사가 넘쳐나는 이 팍팍한 세월에 따뜻함 가득한 진정한 성공의 한 전형을 제시해 주시니, *독서는 만 병의 명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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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4: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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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알바트로스 (210.XXX.XXX.103)
정말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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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3: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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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210.XXX.XXX.253)
비디오는 오래 전 이 제목으로 나왔고요, 작년엔가 ebs TV에서는 '84번가의 연인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연기파들이라 참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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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2:5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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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숙 (211.XXX.XXX.25)
책 소개 감사합니다.
나는 외국에 사는 친구가 영어본을 보내주어 읽었는데 정말 기분좋게 읽었어요.
영화화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요상한 제목으로 상영되었다는
이야기는 처음입니다. 찾아서 보려고 합니다.
다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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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2: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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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210.XXX.XXX.151)
자본주의가 낳은 성공만능주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하지만, 성공의 정의가 제대로 내려지지 않은 세상속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출세하고 돈 많으면 성공이라고 부르는 이 세상이
병들어 가는것은 당연한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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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1: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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