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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간 어느 친구의 추억
황경춘 2009년 06월 06일 (토) 07:40:18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중생(衆生)은 언젠가는 생명을 다하며, 살고 죽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 불교와 기독교에서 설명하는 인생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대부분의 범상인(凡常人)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슬퍼합니다.

그 중에서도 부모 형제 등 가족과의 사별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입니다만 한편 사춘기를 통해 고락을 같이 해온 학창시절의 오랜 친구의 죽음은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만감이 교착(交錯)하는 상실감을 안겨줍니다.

지금도 가끔 그가 없는 빈자리를 아쉬워하며 그와 같이했던 옛날을 가슴 아프게 회상하는 먼저 간 친구 한 사람이 있습니다. 80년대 후반 당시의 소련에 살면서 우리나라 ‘북방정책’ 추진에 많은 도움을 준 유학구(柳學龜) 박사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1989년 10월 22일 당시 김영삼 민주당총재 초청으로 내한한 유학구 소련 동방연구소 연구원(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김포공항에서 가족들과 만나고 있다. <한국일보 제공>  
 
기구한 운명으로 우리민족이 광복의 기쁨을 맞이한 후에도 타의 반 자의 반(他意半 自意半)으로 40여 년을 소식이 단절된 먼 외국에 머물렀기 때문에 저와 가까이서 지낸 것은 불과 20여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세월 동안에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의 수십 년에 버금가는 우정을 불태웠습니다. 그가 외국에서 생활한 40여 년 동안에도 집안끼리 가까운 왕래가 있었기에 그와의 우정은 이런 공백에 상관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초등학교는 달랐지만 1938년 4월에 경남 서부에 있는 진주공립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에 같이 입학했습니다. 당시 조선을 통치하던 일제는 기고만장하였습니다. 조선반도 강점에 이어 중국대륙에 침략의 야욕을 뻗치기 시작한 일본 제국주의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국 동북부 만주에 괴뢰정부를 수립하여 이름만의 독립국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 중심부의 침공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진주에서 당시 드문 조선인 변호사로서 활동하고 있던 그의 부친은 원래 제 고향 출신으로 우리 동네에는 그의 먼 친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우리는 처음부터 가까운 친구로 출발하여 학교에서는 서로 학년 수석을 다투는 공부벌레이기도 했습니다.

꿈 많은 5 년 간의 학창생활 끝에 그가 진학하기로 택한 상급학교가 만주 하얼빈에 있는 만주국립대학 하얼빈 학원이었습니다. 여기서 러시아어를 전공하던 그는 1945년 8월 일본 항복 1주일 전에 당시의 소련이 돌연 선전포고를 하여 국경을 넘어 공격하는 바람에 현지에서 학도병으로 소집되어 교전하다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항로가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어를 잘 하는 그는 이번에는 소련군이 필요로 하는 통역으로 징발되어 본국으로의 송환이 지연돼 오다가 결국은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본의 아닌 이국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는 소련정부 대외방송국의 요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역사학을 배우고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의 연구원으로 소련의 대일(對日) 정책수립에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국교가 없는 고국에서는 홀몸이 된 그의 모친과 가족들의 그의 생사에 대한 걱정이 대단했습니다. 한편 그는 소련 고관이나 학자들의 일본 방문에 통역으로 동반하는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고향에 연락은 못 했습니다.

한국에 관한 소식은 고국에서 발간하는 연감 등을 통해 대충 듣고 저를 포함한 몇몇 동기생의 동정도 알고 있었다고 후일 털어놓았습니다. 서울에서는 우리 정보당국을 통해 그의 일본 방문을 비공식으로 알게 되어 그의 노모나 가족은 만나게 될 날만을 속 태우며 기다렸습니다.

88 올림픽을 전후하여 ‘북방정책’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자 그의 가족들도 상봉의 가능성에 가슴 부풀었으나 이때 그의 노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1988년과 이듬 해 두 번에 걸친 김영삼 당시 야당 당수의 소련 방문에 많은 도움을 준 그는 이를 계기로 1989년 11월에 드디어 40여 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상도동 측은 방소(訪蘇) 전에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듣고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 중학 동기생이 서울과 진주에서 성대한 환영회를 열어 그와의 회포를 푼 것은 물론입니다.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도 저는 그를 동행했습니다.

그 후 모스크바로 돌아 간 그는 1990년의 노태우 대통령의 방소와 다음 해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제주도 방문, 그리고 1992년의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 등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의 중요한 행사에 나름대로 기여한 공적이 인정되어 연구원으로 일하던 러시아 국제관계연구소 (IMEMO) 기관지의 한국 주재원으로 임명되어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인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이를 두고 단란하게 살던 그는 사고로 아내를 잃고 고국 영주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부인의 유골을 고국에 가져와 장례식을 치른 그는 수년 후 러시아 대사관의 주선으로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새 부인을 만나 재혼을 하고 이내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세종 연구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1989년의 고국방문을 계기로 40여 년 중단되었던 두 사람의 우정은 전보다 더 두터워지고 다음 해엔 저가 회사 일로 모스크바를 1주일 방문하여 재회의 기쁨을 다시 나누었습니다. 그가 영주를 결심하기까지 많은 개인적 접촉을 가지며 국내 사정에 익숙하지 못한 그에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서울에서 매달 가지는 동기생 모임에도 빠짐없이 나오던 그는 지병인 협심증으로 한때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지만 대체로 건강해 술은 얼마 마시지 않는 반면 담배는 퍽 즐겼습니다. 5 년 전 어느 이른 봄 날 갑자기 그가 79세의 파란 많던 생을 마감한 것도 그 협심증 때문이었습니다. 해박한 학식과 풍부한 경륜이 몹시 아까운 한 친구와의 끈끈한 우정 이야기였습니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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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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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완 (211.XXX.XXX.129)
황경춘 선생님의 글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분이 늦게나마 고국에서 여생을 보내신것 참으로 다행입니다. 저도 미국에서 40년을 살고 지금은 중국에서 산지 십년반이 됩니다. 외국에서 사는 사람일수록 고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종완 연변 과기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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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8 15: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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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화 (211.XXX.XXX.129)
선배님 오랜만에 잘 계신 것을 알게 되고 또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글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사회는 지난 세기동안 너무 험한 세월을 살아와 기막힌 얘기들이 여기저기 흩으져 있는 것 같습니다. 다 보물같은 얘기들이고 우리 후대들이 흥미롭고 재산스럽게 간직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 분의 얘기를 소책자에 담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갖고 관심있는 사람들끼리 차라도 마시면서 모여 얘기하고 이것을 후배들에게 전하는 길을 모색하는 길이 없겠는지요. 우연히 선배님의 글을 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정일화(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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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7 1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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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알바트로스 (61.XXX.XXX.136)
몽상적 예술 애호가에 더 가까왔던 제게 미국 등 유럽 선진국이 앞 다투어 종이 호랑이국에 불과한 중국에 유무상 차관을 제공하며 문호 개방을 애걸할 때 도대체 왜들 저럴까 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 구체제 붕괴 후 극심한 가난과 마약,불법천지를 방불하는 혼란한 사회로 희망이 없어 보이며 해외 언론의 심층 취재 보도에 자주 등장하는 러시아 대통령을 제주도에 모시고 융숭하게 대접하는가 하면 제 기억이 맞다면 거의 10 억 달러에 가까운 유무상 차관까지 약속한 노태우 대통령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해외 석학들의 글과 전세계에서 목숨을 걸고 취재하여 보내는 진정한 기자들의 심층 보도는 제 정치,경제,외교의 함수관계에 대한 시야를 넓혀 주었고 노태우 대통령의 퍼주기(?) 정책의 깊은 뜻까지 파악하게 되었죠. "러시아는 남북한의 경제 협력 관계나 통일 어떤 것도 무조건 지지한다" 중국,일본,미국이 때론 은근히 때론 노골적으로 남북한 통일 내지 경협을 경계하는 것과 달리 러시아는 해외 강대국의 입김이 영향력을 끼칠 때 마다 항상 한국의 편에서 든든히 버팀목이 되거나 묵시적인 후원자적 언행을 해 왔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항상 생각이 나는 제 마음의 숙제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잘 한 것 딱 하나 있다면 북방 외교인데...누군가 측근에 유능한 경륜가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러시아가 처한 비참한 상황을 보면 노태우 정부로서는 일종의 도박을 한 셈이지만 러시아는 가스,석유 등 막강한 자원으로 오뚜기처럼 재활하였고 제가 속으로 돌려 받지도 못 할 돈을 왜 유무상으로 빌려 주나 하고 의혹을 품었던 그 원조는 국제 정치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외교상의 종자돈으로서 훌륭히 제 몫을 해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역설하여 왔던 "그 누군가.."가 바로 황선생님의 귀한 글 속에서 실체를 찾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하기도 하여 감사함을 표합니다. 또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외교에 큰 역할을 하신 고 유학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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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7 04: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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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99.XXX.XXX.163)
전 언젠가 부터 사람에게 정을 준다든지 받는다든지 하는 것이 점점 무서워졌습니다.
자식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여 그 후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자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또다른 상실감을 극복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마음을 닫고 사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상실의 대상이 자식이든 부모이든, 친구이든, 상실 후에 받는 괴로움이 너무 크거든요.

지금 이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진솔한 글, 오늘 다시한번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을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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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6 08:00:1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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