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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외숙모의 추억
황경춘 2009년 05월 23일 (토) 08:57:26
계절의 여왕으로 불리는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 어버이날 등 가족에 관한 행사가 많았던 탓인지 돌아가신 분들을 포함해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들에 대한 생각을 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새벽에는 갑자기 외숙모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어딘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기는 하나 외사촌들과의 왕래가 오래 전에 끊겨 생사도 모르는 외숙모 생각이 돌연 떠오른 것입니다.

확실한 나이도 잘 모르는 우리 외숙모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셨고 지금 생각하면 몸매도 가냘퍼 요즘 세상 어디에 내놔도 우아한 여성으로 손색이 없을 분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외숙모를 만난 것은 아홉 살 때 일본에서 소학교 2년을 마치고 아버지 영으로 고향의 조선학교에 전학하기 위해 아버지 손에 이끌려 외갓집으로 왔을 때입니다.

우리 시골 풍속이 어떤 건지 전연 모르고 우리말보다 일본말을 더 잘하는 철부지 아이를 맡게 되었으니 외숙모는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당시 20대 초반이던 외숙모는 지금 생각하면 아마 외아들인 외삼촌에게 시집온 지도 몇 년밖에 안 되었을 걸로 추측합니다. 게다가 저보다 한 살 아래인 이종사촌 하나도 홀몸이 된 이모가 맡기고 간 바로 뒤였습니다.

종일 한문책만 읽고 계시는 외할아버지는 가사에는 별 도움이 안 되시고 초로의 외할머니와 외삼촌만이 얼마 안 되는 논밭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전형적 시골 빈농 살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할 외삼촌은 마을에서 유명한 씨름꾼으로 씨름판이 열리는 근처 시골장이면 반드시 얼굴을 내미는가 하면 또 노름꾼으로도 이름이 나 어떨 때엔 며칠씩 집을 비우는 건달에 가까운 농사꾼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시부모와 집안일을 별 돕지도 않는 남편 사이에서 얼마나 복잡한 사연이 있었겠습니까만 나이어린 제겐 그런 환경 속에서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예쁜 외숙모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가까운 동네 우물에서 물동이를 이고 와 빠른 걸음으로 부엌으로 들어가는 그녀, 논일이 없을 때엔 베틀에 앉아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외숙모는 어린 제게 이해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외숙모의 괴로움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 시골 생활에 권태를 느낀 외삼촌은 젊은 외숙모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돈 벌어 온다며 홀로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이 무렵 외숙모에겐 아직 아이가 없어 그나마 짐은 덜었지만 외아들에 손이 생기지 않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외숙모로서는 틀림없이 또 하나의 말 못할 고민거리였을 겁니다.

외갓집에서 홀로 학교에 다니던 저는 2년 뒤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같은 동네에 정착하게 된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막내인 외삼촌이 집을 비운 외가는 자연 네 딸의 맏이인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진주에 있는 중학에 입학한 저는 우리 군에서 함께 합격한 네 사람 중 한 친구가 마침 외숙모의 친정 조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퍽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여름이나 겨울방학에 고향에 돌아오면 반드시 몇 번은 외가를 방문하고 때로는 꽤 길게 외숙모의 말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가끔은 저녁을 얻어먹고 제법 늦게까지 있다가 외할머니의 주의에 황급히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이 생활하고 계신 외숙모는 저와의 대화를 무척 즐기고 객지 도시에서의 학생생활에 많은 호기심을 갖고 여러 가지 질문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춘기에 접어든 저와 홀로 계시는 외숙모 사이의 이런 만남이 고루한 외할머니가 보기에는 좀 남세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젊은 올케를 가엾게 여기는 제 어머니는 항상 뭣인가를 싸주시며 외갓집에 자주 심부름 보냈습니다.

광복이 되기 몇 년 전에 외삼촌이 일본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외숙모와의 사이에 연이어 바라던 남매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외삼촌은 일본에 있을 때 술로 위를 상하셔서 시골에 돌아오신 후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습니다.

외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는 광복 후 제가 부산에 직장을 얻어 고향을 떠난 후에 돌아가시고 몇 년 후에 외삼촌도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직장을 따라 서울로 온 저는 고향 부모를 모셔오게 되었으니 자연 외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가난한 친정에 올케와 아이들을 남기고 서울로 오신 어머니는 항상 친정 걱정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서울 이사를 제안했을 때 선뜻 찬성하시지 않은 데는 아마 그런 걱정이 어머니 머리에 있었지 않을까 생각하니 가끔 그 당시 제 결정에 좀 후회스러운 느낌을 가지기도 합니다.

20여 년 뒤 어릴 적 외갓집에서 한때 같이 자란 이종 동생의 장례식이 부산에서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누님과 함께 이미 초로에 들어선 외숙모와 참으로 오랜만에 재회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눈물의 만남이었습니다.

목공 일로 크게 성공한 이종 동생은 외숙모 일가를 부산으로 불러 와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릴 때의 외가 신세를 톡톡히 갚고 간 이종 동생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어머님이 많이 도와주시긴 했지만 아무 것도 못해드린 저와 누님은 마음이 크게 상했습니다. 그러나 아들과 함께 살며 노인정에 부지런히 다니며 편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과거 어렵게 사실 때의 외숙모님을 생각하며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헤어졌습니다.

이것이 외숙모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고는 전연 생각지도 않으며 누님과 저는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가문과 사주(四柱)만을 앞세워 어른들끼리의 약조로 배필이 결정되던 옛 관습에 희생이 되어 꽃다운 젊은 시절을 빈농에서 남편 없이 홀로 고생하다, 어쩌다 잡은 남편과의 짧은 행복의 나날도 곧 꿈같이 흘려보낸 청초(凊楚)와 수심(愁心)의 화신 같았던 외숙모가 모처럼 가진 말년의 조용한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증이 커져만 갔습니다.

같은 시기의 선진국 여인들과는 달리 ‘칠거지악’(七去之惡) 등 봉건의 계율(戒律)에 묶여 온갖 고난을 참아 온 우리 어머니들, 그들 세대의 한 단면을 가까이서 본 제 젊은 시절의 가슴 아픈 추억에 잠시 잠겨보았습니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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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장미는흐드러지게피었건만 (210.XXX.XXX.253)
경상도가 고향인 저는 그러나 어머니 반열에도 못 들어가는 분들도 보며 자랐고 늙어가는 지금까지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쓰린 분들이 있습니다. 용궁할매라는 제 고모할머니...제 아버지의 고모님이셨는데 혼인 날짜만 받아 놓고 고모할배가 되실 뻔 한 그 분은 일제 강점기 말 징용(강제 전쟁 노동자)로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끌려 간 그 분은 영영 돌아 오시지 못하였고 제 고모 할매는 평생 더부살이 비슷이 살며 잘 대해주는 조카집(저희집)에 오셔서 얹혀 며칠씩 아주 조신스럽게 행동하며 지내시다 가시곤 했습니다.....제 동생의 시집은 거창입니다. 시어머니 친정이 아흔 아홉간 부잣집이었지만 시이모 한 분은 거창 학살로 인해 약혼자를 잃고 평생 수절하고 살고 계십니다. 저도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넋이 반은 나간 듯 말 한마디 없고 보기에도 가련하고 청승스러운게 너무 가슴 아파 가끔 안부를 묻곤 합니다. 민족적 비극에 약혼자를 잃고 인습의 노예가 되어 처녀로 어정쩡하게 시집에서도 친정에서도 확고한 위치를 못 잡은 채 보아하니 우울증이 심각한 듯 반실성 상태인 그 분을 윗 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황선생님의 외숙모님은 그래도 처녀 귀신은 면하고 자식까지 낳았으나 제가 기억하는 한 많은 우리의 어머니(옛 여성세대)들 이야기...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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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4 10:56:06
1 0
필자 (61.XXX.XXX.202)
이종완 선생님 김윤옥 님, 비슷한 가슴 아픈 추억 보내주셔 강동깊이 읽었습니다. 우리
어머니 세대 한국 여인의 슲은 이야기 어찌 이것들 뿐이겠습니까. 언제나 마음 찡한 이런
추억들을 공유함으렀 서로가 조금이나마 위안을 가졌으면 합니다. 글 고맙습니다.
이 선생님 저 외숙보는 아마 90대 후반일 텐데 전연 소식을 몰라 더욱 가슴 아픔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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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4 06: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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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7)
내가 처음으로 뻐꾸기 우는소리에 마음이 빼앗겼던 때는 하지 무렵이었다. 오월 중순에 결혼하고 유월에 접어들었을 때 친정하고는 모든 것이 다른, 낯선 시집에서 서툰 살림솜씨 탓에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나는 울고 싶은 고아 같았다.
처음 울었던 그 유월엔 어디에서 얻어왔는지도 모르는 잡종 강아지도 나를 업신여기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 텅 빈집에 혼자 남기라도 하면 뒤 울안 담에 기대서 먼 신작로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러면 뻐꾸기가 내 마음처럼 아득한 그리움으로 울었다.
..............
제 신혼시절의 아득한 그리움을 썼던 잡문의 한 부분입니다. 시대는 좀 다르지만 제게도 황선생님의 외숙모님의 삶을 이해 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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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3 22:5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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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완 (119.XXX.XXX.228)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재미 있고 감동적입니다. 외숙모님 되시는 분이 아직 생존해 계신지요? 저는 저보다 훨신 위인 사촌 형님의 부인이 보기 드문 미인이셨고 여러 해 전에 혼자 되신 후 지금도 생존해 계십니다. 고국에 갈 때마다 대전에 사시는 형수님을 찾아 뵙고 예날을 회상합니다. 황 선생님의 외숙모님과 비슷한 점이 많은 분입니다. 가난에 시달리고 인권이라고는 개념조차 없었던 그 시절의 천사 같은 사람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종완 연변 과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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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3 20: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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