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김이경 책방
     
바람피우고 싶은 날 -『순수의 시대』
김이경 2009년 05월 12일 (화) 08:40:03
아카시아 향이 온몸을 간질이는 봄날, 꽃가루 날리는 거리를 지나 은행으로 향합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챙겨야 할 기념일이 한 손 가득입니다. 문득, 5월에 이 모든 날들을 몰아넣은 의도가 궁금해집니다. 혹시 꽃향기 자욱한 계절에 취해 길을 잃을까 봐 일부러 아이에 부모님에 선생님과 배우자까지 두루두루 챙기게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바람피우기 좋은 이 계절을 무사히 지나기 어려울 줄 알고 말입니다.

‘이 사람이다!’ 믿고 결혼했다고 ‘이 사람인가?’ 싶은 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살랑살랑 봄바람은 불고 하늘하늘 치맛자락은 나풀대는데 눈길이 담 안에만 머물길 바랄 수는 없지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집을 두고도 여행을 꿈꾸는 것이 사람이듯, 사람이기에 가끔은 다른 사람 다른 삶을 기웃대는 것 아니겠어요?

명문가 출신의 변호사 뉴랜드 아처가 아름답고 기품 있는 약혼녀 메이를 두고 추문의 주인공인 엘렌 올렌스카 백작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다름’ 때문이었습니다. 엘렌을 만나기 전 아처는 자신이 속한 뉴욕 상류사회의 격식과 관습을 누구보다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또 세련된 취향과 순수함을 지닌 메이에게 매일 아침 은방울꽃을 보내 사랑을 표현할 만큼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지요.

그랬기에 약혼녀의 사촌언니 엘렌을 처음 봤을 때 아처는 눈살을 찌푸립니다. 남편을 떠나 남편의 비서와 눈이 맞았다는 스캔들에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까지, 품행도 취향도 형편없는 그녀가 못마땅하기만 했지요. 아처는 세간의 시선에 아랑곳 않는 엘렌에게 분노하고, 사촌언니의 추문 때문에 곤란해진 메이를 안쓰러워합니다. 당초 계획보다 서둘러 약혼을 발표한 건 그 때문입니다.

덕분에 엘렌으로 인한 소란도 가라앉고 사랑스러운 메이와 약혼도 하였으니 모든 일이 잘된 셈인데 이상하게 아처는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왠지 모를 불안감 속에서 아처는 결혼을 서두릅니다. 관례적인 약혼기간을 대폭 단축해 당장이라도 결혼식을 올리자고 재촉하는 아처에게 메이는 투명한 눈으로 묻습니다. “당신이 그때까지 내게 애정을 품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인가요?”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면 “세상의 의견을 거스르고라도” 그녀와의 사랑을 지키라고 말하는 메이에게 아처는 감동을 받습니다. 인습에 길들여진 나약한 여자인 줄 알았던 메이가 세상의 시선을 두려워 않는 용기 있는 여자라는 데 그는 경외심을 느낍니다. 자기가 알던 모습과는 ‘다른’ 메이가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놀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처는 메이에게서 엘렌과 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보고 싶어 하지만 메이는 메이일 뿐 엘렌이 아닙니다. 예전엔 메이의 우아하고 품위 있는 모습에 반했지만 이제는 틀에 박힌 그 모습에 싫증이 납니다. 과거의 사랑에 대한 불만이 커질수록 미래의 사랑에 대한 갈망도 커집니다. 익숙해서 안전한 메이와 낯설기에 매혹적인 엘렌 사이에서 아처는 흔들립니다.

이디스 워튼(1862-1937)은 퓰리처상 수상작 『순수의 시대』에서 아처를 흔든 바람의 정체를 섬세하게 파헤칩니다. 이 작품이 세 차례에 걸쳐 영화화될 만큼 연애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아처, 메이, 엘렌 세 사람의 다른 듯 닮은 삶을 세밀하게 그려내 독자의 공감을 끌어냈기 때문입니다.

아처는 인습에 사로잡힌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탈출을 꿈꾸지만 막상 현실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반면, 현실 너머를 상상한 적이 없는 메이는 흔들리는 남편을 보며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현실을 지킵니다. 그리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통해 현실을 깨달은 엘렌은 인습에서 비껴나 있지만 인습의 힘을 무시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습니다.

연애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이디스 워튼이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은 사랑의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현실의 힘입니다. 냉엄한 리얼리스트인 워튼은 사랑조차 현실을 부인할 만큼 강력하지는 않으며, 불같은 사랑이란 것도 실은 잠깐의 현실 도피일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믿는 이들에겐 좀 가혹한 이야기지만 그게 또한 사실이 아닌지요?

정신분석학자 레나타 세나클은 『사랑과 증오의 도착(倒錯)들』이란 책에서 이 소설의 애정관계를 분석하며 흥미로운 지적을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아처 역시 금지된 사랑에 끌리면서도 막상 사랑이 실현되려 하면 그 직전에 발을 뺀다는 거지요. 물론 두려움이나 죄책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처가 결정적 순간마다 자신의 의지보다 상황을 핑계 삼아 엘렌을 포기하는 것은 세상의 눈이 두렵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현실이 되는 거지요.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물가물할 때는 간절하다가 막상 곁에 있으면 심드렁해지는 게 사랑이라고들 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 페로몬의 효능이 다한 탓도 있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이상 안달하고 갈망하지 않아도 될 때 왜 우리는 평온한 기쁨을 느끼는 대신 권태와 실망을 느끼는 걸까요? 우리가 원한 게 그이라면 그이를 얻는 순간 행복하기만 해야 할 텐데 왜 묘한 허탈감을 느끼는 걸까요?

그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그이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이를 사랑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자신을 느끼고 사랑합니다. 아처가 사랑하는 것은 엘렌이 아니라 엘렌이라는 금지를 사랑하는 자신입니다. 아처가 엘렌을 통해 자기 안에 숨은 또 다른 자기를 발견하고 감동하듯이,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고 그런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사랑은 그래서 자기애의 표현입니다.

간절히 사랑한 사람을 가졌는데도 지금 불행하다면 그건 그 사람이 변해서가 아니라 내가 변해서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 발견했던 내 모습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랑의 바탕에 자기애가 있다는 걸 깨달으면 섣부른 바람은 사절하게 됩니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싶은 날, 가만히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냐고, 그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냐고, 내 사랑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냐고. 그런 뒤에도 바람이 피우고 싶다면 눈 딱 감고 바람 한 번 피우지요, 뭐!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4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이종완 (211.XXX.XXX.51)
선생님의 글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모르는것, 다른것, 없는것 등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것들을 얻었다고 만족이 있는 것은 아니인데도 한번 해보다가 손해를 보는게 인간의 어리석음이지요. 지금 나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종완
연변 과기대 교수
답변달기
2009-05-15 09:35:36
0 0
이무석 (211.XXX.XXX.51)
‘바람 피우고 싶은 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현실의 힘’이 엄청 세지요.. 사랑이 이루어질까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인상적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오는 날 광주에서 정신분석가 이무석 배
답변달기
2009-05-15 09:33:46
0 0
그래도 꽃이 피면 떠나요... (210.XXX.XXX.103)
대부분 공감입니다....다락방에서 세도 제대로 못 내는 가난한 시인,철학가,화가가 펼치는 따스하고 해학적인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인 미미와 로돌프... 두 연인 이야기가 연상되는 사랑에 대한 정의도 아주 흥미롭군요. 열렬히 사랑하여 합쳐 살게 되었으나 얼마 못 가 싫증이 났을까 님 글 속의 분석한대로 페로몬이 다해서일까 사랑하지만 헤어지자는 두 연인..헤어지면서 미미가 로돌프에게 하는 이야기(아리아..) "그래도 꽃이 피면 헤어져요...( 눈이 펑펑 내리는 배경)"..싯귀를 연상시키는 님의 글도 라보엠의 가사처럼 매혹적입니다. 베르디 작품들에 심취한 제 취향에 맞지는 않지만 시처럼 엮어지는 대사가 매혹적인 라보엠을 연상시키는 님의 자극적이고 영롱한 글귀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답변달기
2009-05-12 13:24:07
0 0
흔들리는 사람 (211.XXX.XXX.52)
'흔들리는 사람'과 너무 크지 않은 우산 하나를 나누어 받고 봄비 속을 거닐고 싶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쪽 날개가 젖고 한 사람은 왼쪽 날개가 젖으면 한적하고 어두운 카페에 들어가 얼굴을 노을로 물들이며 날개를 설핏 말린 다음 다시 비오는 길로 나서고 싶네요... 파스칼의 말이 아니더라도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은 인간적인 특성이건만 요즘 흔들리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의심없이 남들이 믿는 것을 믿으며 흔들리지 말고 해야 하는 일만 하고 살아야 편하고 안전하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순수의 시대"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요...
답변달기
2009-05-12 09:31:32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