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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문장’ 이건창(2)
방석순 2009년 05월 11일 (월) 08:32:58
= 껍데기뿐인 역사의 현장 =

강화도 동남쪽 초지진을 지나 해안가 길로 서쪽으로 달리면 함허동천, 정수사에 조금 못 미쳐서 화도면 사기리에 이르게 됩니다. 길이 크게 꺾이는 지점 안쪽 야트막한 흙 담장 안에 작은 초가 하나가 서 있습니다.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에 있는 이건창 생가의 안채.  
사랑채라고 할 것도 없이 헛간 같은 방 두 개가 좌우로 붙은 출입문을 들어서면 손바닥만한 마당입니다. 불과 열 걸음 안팎에 부엌과 마루, 방 두 칸이 달린 ㄱ자 형태의 작은 안채가 있습니다. ‘조선 제일의 문장’으로 칭송받던 이건창이 태어나고 공부하던 생가입니다.

대대로 판서, 참판, 대사헌을 냈던 명문의 본가라 하기엔 초라한 모습입니다. 근 3백 년 이어온 터지만 후손들이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탓입니다. 1996년 강화군이 초가를 복원해 지금은 인천시기념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마루에는 이건창의 글벗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쓴 ‘명미당(明美堂)’이라는 당호(堂號) 하나가 달랑 걸려 있습니다. 집안에 전해온 유물이나 천하의 문장가 이건창의 문집은커녕 글귀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마당 한쪽의 우물이 마르지 않아 그나마 인적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안채 마루에 글벗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써 붙인 명미당 당호.  
마침 동네 어른 한 분이 명미당 마루를 걸레질하고 있었습니다. “초가로 지어졌지만 그래도 예전 판서 어른이 살던 댁이라 인근에선 모두 우러러 보았지요.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내가 강화군서 주는 용돈 조금 받고 매일 청소하는 정돕니다. 집 뒤 선조들 묘도 동네 노인들이 가끔 잡초를 깎아주고 있어요.”

명미당 내부의 허전함을 달래주듯 1997년 한국문학비건립위원회가 담장 바깥에 초가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오석에다 선생의 시구를 새겨 ‘이건창 선생 문학비’를 세웠습니다.

- 崧陽道中(숭양도중: 숭양 가는 길에) -
崧陽六載五經過(숭양육재오경과: 개성을 육년 사이에 다섯 번 지났지만)
不見扶山與彩霞(불견부산여채하: 부소산과 채하동도 들르지 못했네)
細數一生遊宦事(세수일생유환사: 자세히 헤아리니 일생 동안 벼슬살이에서)
會心惼小役形多(회심편소역형다: 마음에 맞는 일보다는 몸만 고달팠네)

스스로가 읊었듯이 이건창의 벼슬살이는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어지러운 시류에 물들지 못한 탓입니다. 암행어사가 도리어 모함 받아 평안도 압록강변의 오지 벽동으로 유배가기도 하고 벼슬을 사양하다 고종의 노염을 사 전라도 고군산도에 귀양가기도 했습니다.

이건창의 5대조 이광명 공은 영조 때 당파싸움을 피해 선영을 받들고 강화로 솔가해 왔다고 합니다. 그는 한발 앞서 강화에 정착한 정몽주의 후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문하에서 양명학에 정진합니다. 하곡 역시 숙종 때 여러 관직에 불려갔다가는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물러났던 골수 학자였지요. 이때부터 지식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는 양명학은 이씨 가문의 가업처럼 전수되어 왔습니다.

명미당 바로 뒤편으로 5대조 이광명(李匡明,) 7대조 이대성(李大成) 등의 유택이 보입니다. 이대성 묘에는 비석과 상석, 망주석이 서 있지만 나머지 봉분에는 아무 표지가 없어 영의정으로 추증된 이건창의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의 묘도 분간할 길이 없습니다.

이건창은 어린 시절 이곳 선조들이 묻힌 언덕 아래서 자라며 양이(洋夷)의 강화도 침범에 자진한 할아버지 이시원 형제의 순국을 목도했습니다. 또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도 이곳에서 일본의 강점에 분개하고 기우는 나라를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고종 35년 마흔여섯의 많지 않은 나이에 이곳 강화 땅에 묻혔습니다.

생가에서 서북쪽으로 삼십여 리 떨어진 양도면 건평리. 국도변에서 작은 안내판을 간신히 찾아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건평교회 맞은편 언덕배기 민가 뒤에 봉분 하나가 쓸쓸히 누워 있습니다. 비석도 상석도 없이 잡초만 무성합니다. 인천기념물이라는 철제 안내판이 없다면 진작 버려진 무덤으로 보일 정도로 황량합니다.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민가 뒤 언덕에 있는 이건창의 묘.  
안내판 첫머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구한말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영재 이건창 선생의 묘소’. 강화 언덕에 버려지듯 누워있는 ‘조선의 마지막 문장’ 이건창의 묘를 돌아보고 내려오자니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서울 송파에서 본 ‘암행어사 이건창 송덕비[暗行御史 李公建昌 永世不忘碑]’가 눈앞에 어른거리기도 합니다.

건평교회 아래층 쪽문에 뜻밖에 ‘명미당’이란 당호를 복사해서 ‘한국학(강화학)연구회 부설 명미당 서사시문학학교’라고 덧쓴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문은 마침 굳게 닫혀 있었지만 강화도 한 귀퉁이에 그의 문장을 연구하는 모임이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습니다.

방방곡곡에 ‘선조의 숨결을 간직한, 우리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라고 자랑하는 유적지는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헛간처럼 덩그렇게 벽체와 지붕만 있을 뿐 선인의 유품이나 유물, 하다못해 모형이라도 제대로 갖춰놓은 곳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선인들의 정신세계를 느껴보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껍질만 세우고 속은 텅 비운 탓입니다. 정작 역사 속의 주인공이 묻힌 무덤은 경계조차 없이 방치된 상태입니다.

고려산 언저리의 고인돌 무더기서부터 단군신화가 깃든 마니산 참성단, 39년간의 항몽투쟁을 위해 세운 고려궁 터, 강화도에 도성을 쌓았던 고려 고종의 홍릉(洪陵), 고려조 명문장가 이규보의 묘, 조선조 연산군의 교동 유배지, 철종이 유배시절 살던 용흥궁, 두 차례 양요(洋擾)와 일본의 운요호[雲揚號] 침범을 겪은 진지들…

강화도에는 정말 구슬처럼 많은 역사적 유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곳에 사는 사람도 있고, 찾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도처에 널린 역사의 구슬들을 잘만 꿰어 담으면 각각의 테마를 갖춘 훌륭한 역사관광 자원이 될 수 있을 터인데, 이곳저곳 마지못해 흉내만 낸 유적, 기념물의 관리행태가 아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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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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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211.XXX.XXX.199)
고생만 하다가 먼저 세상을 뜬 부인을 애도해 '눈물을 닦으며 술잔을 권한다'고 쓴 제문, 도를 닦듯 짚신을 삼는 짚신장수를 칭찬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이건창이 책 속에만 얼굴을 파묻고 살던 서생이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이규보, 김상용, 홍익한, 윤집, 정제두, 이건창 등등 강화도 인물들과 관련된 유적과 자료를 정비해 강화도 관광테마로 개발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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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3 09:29:16
1 0
그래도 꽃이 피면 떠나요 (210.XXX.XXX.103)
한자로 쓴 글이라면 말입니다. 운동화 바람으로 하인 한 명을 대동하고 기차로 원산에서 내려서 한 달 이상 금강산,원산,묘향산 등지를 섭렵하면서 기록한 시와 수필(일기체)을 읽어 보면 그 당시의 현실을 그림 보듯 파악할 수 있고 유머와 통찰력,해박함과 휴머니즘... 유려한 문장력에 놀랄 뿐입니다. 언문으로 쓰지 않으셨던 것이 못내 아쉽고 한계성을 느낍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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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13:32:19
1 0
길상 (203.XXX.XXX.7)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일컫는 우리 강화인데 각종 문화재의 보존과 관리에 너무 허술하고 체계적이지못함을 누누이 지적당하면서도 늘 그러함을 군민으로 자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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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10:54:57
1 0
tffseouj (61.XXX.XXX.123)
한정된 지역만을 본 경험이지만 우리 이웃나라들은 오랜 전국시대를 겪었지만 조상들의
문화유산을 부러울 정도로 잘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문화유산 보존은 이들에
비하면 부꾸러울 따름입니다. 위정자나 국민의 가치관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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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22:51:13
1 0
김윤옥 (210.XXX.XXX.99)
강화도에는 정말 구슬처럼 많은 역사적 유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곳에 사는 사람도 있고, 찾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도처에 널린 역사의 구슬들을 잘만 꿰어 담으면 각각의 테마를 갖춘 훌륭한 역사관광 자원이 될 수 있을 터인데, 이곳저곳 마지못해 흉내만 낸 유적, 기념물의 관리행태가 아쉽기만 합니다. ............ 뜻 있는 분 몇 분만 계셔도 우리문화 유산이 빛을 발할 수 있겠지요. 어려우시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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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12: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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