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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가, 필연인가
황경춘 2009년 05월 09일 (토) 08:00:30
우연이냐 필연이냐, 이것은 인생의 영원한 화두인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의 주요 화제로, 철학이나 문학작품의 주제로 자주 다루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의 큰 관심사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겠지요.

필연을 강조하는 유물론에서는 모든 우연적 현상도 결국은 필연적 원인과 진화 요소의 궁극적 결과라고 진단한다는 이야기를 옛날 어디선가 읽은 것 같아서 몇 개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보았으나 제 기억을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느 영문으로 된 논문에서는 일본어에서 ‘훔쳐 온 기술적 용어’라며 우연과 필연을 일본어 발음대로 소개하고 (1)모든 사물은 필연, 즉 어떤 확대된 의미의 플랜(plan)의 일부거나 (2)이 세계는 우연과 필연의 혼합체이거나 (3)아니면 이 세상에는 우연만이 존재하고 필연으로 보이는 것은 다만 환상(幻像)에 지나지 않다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을 뿐이라고 전제하며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주 대학선배와의 점심 모임에서 신 선배가 '우연한 운명의 장난'으로 죽음의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이야기를 끄집어 낸 때문입니다. 그 분의 책에서도 이 이야기가 소개되고 다른 자리에서도 몇 번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 중 첫 번째 이야기는 들을수록 기가 막히는, 참으로 신기한 ‘우연’의 연속이었습니다.

1943년 9월,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국의 맹공으로 다급해진 일제는 전국의 전문대ㆍ대학교 문과계열 학과를 거의 폐쇄하고 학생들을 전쟁터로 몰아냈습니다. 당시 신 선배는 도쿄에 있는 주오(中央)대학 법과에 다니고 있었으니 당연히 청운의 꿈을 접고 일단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같은 하숙에 있던 친구 한 분과 함께 둘이서 10월 4일 밤 10시에 시모노세키(下關)를 출항하여 부산으로 가는, 당시 한일 간의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타기 위해 10월 3일 오후 도쿄를 출발하는 기차표를 샀습니다.

당분간 도쿄에 남아 있기로 한 고향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두 사람은 3일 오전에 시내 중심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그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은 통학정기권 노선에서 두 정거장 벗어난 곳에 있었으나, 검표원에 걸려도 정기권을 보이고 초과요금만 내면 되니 표를 따로 사지 않고 그냥 탔습니다.

갈 때엔 문제가 없었는데 재수 없이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험상궂은 검표원에 걸렸습니다. 학생 신분임을 밝히고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친구 집을 방문하고 오는 길이라 설명했으나 이 검표원은 부정승차 당사자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인지 다음 역에서 내려 역장실까지 끌고 가 학생증을 뺏고 조회해야 한다고 나가버렸습니다. 두 사람을 1시간 이상 방치해 두고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후 도쿄역에서 승차할 기차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이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역장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 나타난 검표원은 이제 충분히 반성했느냐고 능청을 떨면서 학생증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하숙집에 들러 짐을 가지고 예정된 기차를 타기엔 이미 너무 늦어 할 수 없이 다음 연락선에 맞추어 새로운 급행권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이 탄 급행열차가 히로시마(廣島) 가까이 왔을 때 돌연 긴급 차내 방송으로 “사정에 의해 관부연락선 운항이 당분간 중지되었으니 연락선을 이용해 조선ㆍ만주 방면으로 갈 승객은 일단 다음 역에서 내려 귀가하기 바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일단 종점까지 가 보기로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연락선 매표구 앞에 줄서 있는 100여 명 뒤에 급히 붙어 서니 얼마 안 가 기다리는 사람 수는 천명을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설명도 들을 수가 없었답니다.

기다리다 지친 몸으로 여관에서 하루 밤을 지낸 다음 날 아침 신문을 보고 두 사람은 다시 질겁했습니다. 2차 대전 중 일본의 내해에서 운항하는 관부연락선이 미국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하는 최초의 충격적인 사건이 보도되었던 것입니다.

1943년 10월4일 밤 10시에 시모노세키를 출항한 최신 호화 여객선 ‘콘론마루’(崑崙丸)는 새벽 1시15분 경 미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쓰시마(對馬島) 근처 해상에서 격침 당했습니다. 정원 2,050 명의 대형 여객선이었으나 마침 군용열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승선 예정이었던 군인이 많이 타질 못해 승객 479 명과 승무원ㆍ기관원 176 명 등 총 655 명만 태운 채 출항했었다고 당시 철도국 보고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승객 28 명을 포함해 72 명만이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이 참사로 연락선의 야간 운항이 중단되고 10월 6일부터 주간만 일본 군용기의 보호 하에 출항했으며 그 첫 배로 신 선배 일행은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신 선배는 자기 책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여하튼 이번에 살아 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검표원이니 도리어 생명의 은인으로 엎드려 절하며 감사를 표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나 우리는 끝내 그를 고맙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운명의 여신에겐 마음 속 깊이 감사를 드리면서도….”

그러면서 그는 만일 10월 3일 오전에 고향 친구 집을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또 두 구간 기차표를 정상적으로 샀었더라면, 그리고 검표원에 발각되었어도 운임 정산만 제대로 끝났더라면 두 사람은 그 4일 밤의 운명의 연락선을 탔을 것 아니냐고 회상하며, 기적 같은 사연의 연속으로 죽음을 면한 운명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이 블로그에서 “우연과 필연에 관한 정의를 사전적 의미로 또는 확률적으로 접근하여 풀이하자면 재미가 없습니다”라고 한 대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로또 당첨까지도 확률로 필연적이라 풀이하면 너무 건조하지 않을까요? 이 답답하고 각박한 세상에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 우연이 아닐까요?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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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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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춘 (61.XXX.XXX.225)
김윤옥 님, 저 글을 읽고 제가 크리스찬이 아닌 것를 담박 아셨구만요. 진정한 교인임이
왜 부끄러운 일입니까? 언제나 일부 못난 사람이 다수를 묙먹게 하는 짓이 나뿐 거지요.
필연(우연)을 믿고 최선을 다 하지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문제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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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1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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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99)
우연이나 필연, 모두를 관장하시는 분은 태초부터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의 계획안에 있다고 늘 생각합니다.
북쪽에서 우리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사선을 넘으셨던 부모님은 거의 빈손으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배운 것 별로 없으시고 가진 것 없는 두 분이 다섯남매를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어찌 부모님의 능력 때문이었겠습니까?
어머니는 한경직 목사님을 따라서 우리를 위해서 늘 기도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이자리에 이런 모양으로 선 것도 그분의 은혜인 줄 잘 알기에 부족함을 탓하지않습니다.
보내신이가 거두어 가실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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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22: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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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219.XXX.XXX.170)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 이 세상에 우연이란 이름으로 발생한 경험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건 우연이 아니고 필연에 속하는 일이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 없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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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20: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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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춘 (61.XXX.XXX.2)
인생 만사가 새옹지마라고 자위하시는 이종완 선생 그래서 이렇게 살아 남은 것
아니겠습니까.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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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15: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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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222.XXX.XXX.15)
저는 (3)의 관점에 어느 철학자도 말하였지만 광기(狂氣)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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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9 18: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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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23.XXX.XXX.28)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일에 더 큰 의미를 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도 취조를 받던 중에 바로 옆자리에 천정에 매단 큰전등이 떨어졌더랍니다. 무거운 전등이고 또 바로 머리 위라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위치였는데 그 자리에 앉지 않아서 목숨을 구했다고 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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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9 14: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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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완 (119.XXX.XXX.228)
참으로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제가 6.25 동란 때 미군 통역으로 종군하다가 어느 미군 병사의 총기 오발 사고에서 오른 팔에 중상을 입고 평생을 불편하게 살고 있으나 그때 다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확율이 높았습니다. 인생 만사가 새옹지마 라는 말이 맞는것 같습니다. 너무 좋아하거나 슬퍼할 일이 없는 세상입니다. 황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재미가 있어 좋습니다. 계속해 좋은 글 많이 쓰세요. 이종완 연변 과기대 영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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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9 11: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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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근 (119.XXX.XXX.228)
세상엔 그런 일이 참 많읍니다.
작은 행운에서 목숨 구하는 선택 까지.
그 분 속된말로 억세게 운이 좋은 것이지요.
군대에서 말하는 줄을 잘서면 좋은 보직 받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군용열차 늦어 연락선 못타서 목숨 구한 수많은 군인들도 우연입니까?
그냥 사건으로 해석하면 편합니다.
행운, 선택, 우연 모두 상관 관계가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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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9 10: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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