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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 때려주고 싶을 때 -『비밀엽서』
김이경 2009년 04월 28일 (화) 07:56:05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 오히려 말문이 막힙니다. 도(道)에 관심 없다고 했다가 몇 시간 안에 죽을 거라는 저주를 들었을 때, 거스름돈 천 원 받았는데 가게 주인은 오천 원 줬다고 박박 우길 때(더구나 지갑 안에 어제 넣어둔 오천 원짜리가 있을 때), 새로 낸 책을 챙겨줬더니 네가 이런 것도 쓸 줄 아냐고 의심스런 눈길을 보낼 때, 새벽에야 집에 온 남편이 왜 안 자고 사람을 들볶느냐며 성을 낼 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온갖 부탁 다하던 친구가 모처럼 한 내 부탁은 들은 척도 안 할 때… 하고픈 말은 많은데 막상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자려고 누웠지만 입도 벙긋 못하고 바보같이 돌아선 자신이 떠올라 새삼 분이 납니다. 거리의 도인에게, 가게 주인에게, 의심 많은 지인에게, 적반하장 남편에게, 이기적인 친구에게 분노의 하이킥을 날립니다. 내친 김에 바닥에 바나나껍질도 놔두고 열쇠구멍에 껌도 쑤셔 넣고 한밤중에 장난전화도 겁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복수의 시나리오를 쓰는 사이 슬며시 분이 풀리고 잠이 옵니다.

때려주고 싶은 순간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그럴 때 분을 푸는 비법 한두 가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겁니다.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 엽서들을 모은 『비밀엽서』, 이 책에는 남세스런 일이라 감추고 있던 이런 비법들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일테면, 남편이 먹을 수프에 ‘공포의 분비물’을 집어넣는 좀 거시기한 방법부터 과자에 욕을 써서 구워먹는 꽤 고소한 방법까지, 당장 실전에 응용하고 싶은 비법들이 눈길을 끕니다.

   
언뜻 최신 디자인 책처럼 보이는 『비밀엽서』는, 프랭크 워렌이란 사람이 엮은 그림엽서 모음집입니다. 큐레이터로 일하는 워렌은 2004년 11월, “당신을 익명의 비밀고백 프로젝트에 초대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3천 장의 엽서를 인쇄해 지하철역과 도서관 등에 놓아두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자신의 비밀을 적어 보낼까? 엽서를 뿌리면서도 워렌은 긴가민가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인쇄한 3천 장이 돌아오고도 엽서는 계속 이어졌고, 그렇게 4년 동안 15만 장의 엽서가 쏟아졌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엽서들 중 일부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책에는 자기만의 비밀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낸 엽서들이 가득합니다. 비밀에 어울리는 그림과 사진을 이용해서 꾸민 엽서들은 하나하나가 예술작품입니다.

   
  “내가 자위를 할 때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큰 실망감을 안고 날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끔 중국음식을 사 가지고 올 때 뚱뚱하고 외로운 실패자처럼 안 보이려고 2인분을 주문해요. 그리고 그걸 다 먹어요.”  

슬며시 미소가 떠오르고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다른 사람의 비밀을 엿보는 은밀한 쾌감에 ‘나도 그래!’ 하는 공감이 더해져 책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하지만 킬킬대며 책장을 넘기는 사이 가슴 한쪽이 싸해집니다.

“창의적인 글쓰기를 가르치는 수입 : 32,645달러. 창의적인 글쓰기 수입 : 0달러”
“3살 때 아빠는 내가 숱 많은 머리칼을 빗겨드리는 걸 좋아했어요. 하루는 아빠가 빗겨 달라고 했는데 싫다고 했죠. 그리고 다시는 보지 못했어요. 아빠는 떠났고 그 후 돌아가셨어요. 65살이 넘은 지금도 그게 내 잘못이란 생각이 들어요.”
“난 남부 침례교 목사부인이에요. 아무도 내가 하나님을 안 믿는 걸 몰라요.”
“엄마를 죽게 만든 병과 똑같은 병에 걸렸다고 아버지한테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성폭행 당한 일을 엄마한테 말할 수 없어. 엄마는 알고 싶지 않을 거야. 그게 죽을 만큼 힘들어.”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시인 이상(李箱)은 말했지만, 『비밀엽서』를 보면 비밀을 갖고 산다는 게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비밀을 엽서에 적어 낯선 이에게 보낼 만큼 사람들은 그 무게로 힘겨워 합니다. 말하지 못한 상처, 말하지 못한 사랑, 말하지 못한 거짓말과 말하지 못한 소망을 엽서에 적어 낯선 이에게 보내는 사람들. 그들의 아픔과 고독이 작은 엽서 한 장에 가득합니다.

   
귀여운 아기 사진 옆에 얌전히 적힌 글귀.
“평생 사람들은 내가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더군. 나는 늘 쉽게 잘릴 수 있는 사람이었지. 43년 만에 그 말이 이해됐고 마침내 난 그 사실을 받아들였어.”
가슴이 철렁합니다. 담담한 고백 속에 담긴 한 사람의 절망이 너무 커서 눈앞이 흐려집니다. 이 엽서를 보낸 사람이 부디 무사하기를,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고백은 행복한 대로, 목이 메는 사연은 목이 메는 대로 읽는 이에게는 힘이 됩니다. 엽서를 보낸 이들이 겪었을 아픔이 느껴지면서 그들이 엽서를 쓰고 보낼 용기를 낸 것이 고맙습니다. 모두 비슷한 아픔 속에서 살아가니 나도 힘을 내자고 생각합니다. 너무 절망하지도 너무 미워하지도 말자고 다짐합니다.

사람들이 밉고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날, 작은 엽서에 오랫동안 하지 못한 말을 적습니다. 우표를 붙이고 빨간 우체통에 엽서를 집어넣습니다. 왕국의 대숲을 수런거리게 했던 임금님의 이발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잠깐의 후회가 지나고 홀가분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늘 보던 얼굴들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저마다의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들, 비밀이 그들의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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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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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섭 (59.XXX.XXX.123)
43년만에 자신의 진실을 직면하고 고백한 그 사람은 아주 잘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말을=그 진실을 입으로 뱉을 정도로 그 사람은 강해져 있다는 증거이고, 이미 그 말을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예전의 그 무능력자가 아닐 테니까요. 저 역시 그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근데 전 43년보다 더 지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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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6 16:44:46
0 0
우체통 (211.XXX.XXX.40)
이 책을 꼭 찾아보아야겠어요! 우선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요.^^
위에 써 주신 비밀 중에
“난 남부 침례교 목사부인이에요. 아무도 내가 하나님을 안 믿는 걸 몰라요.”가 제일 재미있어요!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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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18:33:23
0 0
신아연 (123.XXX.XXX.28)
해거름 혹은 초가을의 알싸함처럼 다가오는 아주 잘 쓴 글, 감사합니다. 내게도 기회가 있다면 어떤 엽서를 쓰게 될까 가만 가슴 속을 더듬어 봅니다.
답변달기
2009-04-28 09:39:3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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