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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문장’ 이건창(1)
방석순 2009년 04월 27일 (월) 09:16:08
- 글을 짓는다는 일 -

흥선대원군과 그가 애써 권문세가를 피해 며느리로 택했던 민비의 정권 쟁탈전은 구한말 역사의 가장 큰 줄기를 이룹니다. 그 와중에 흥선은 청나라에 끌려가고 민씨는 궁중에서 일본 낭인에게 살해되는 비운을 맞습니다. 이씨왕조도 더욱 급격히 무너지고 맙니다.

일인들에 의해 억지 황제 노릇도 해보았지만 고종은 그 아버지와 부인이 벌이는 외세 줄타기에 한숨으로 날을 지새운 유약한 군주였습니다. 즉위 19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배후로 지목된 아버지 흥선이 청에 붙잡혀가 4년 동안이나 억류되자 불효를 한탄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고종은 마침내 ‘조선의 마지막 문장’ 이건창을 불러들여 당부합니다. “그대의 문장으로 청인들이 한 글자를 볼 때마다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라”고.

   
  1996년 인천시가 강화도에 복원한 이건창 생가와 이듬해 한국문학비건립위원회가 생가 앞에 세운 문학비.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5세에 급제하고 19세에 옥당(玉堂)에 들어간 이건창은 탐관오리를 적발하고 어려운 백성을 구휼해 송덕비까지 세워진 강직한 관리였다고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2009년 3월 16일 ‘암행어사 이건창’).

강화도령에서 이조 25대 임금에 오른 철종 즉위 3년(1852년) 이건창은 바로 그 강화도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판서 벼슬을 내어놓고 향리에 묻혀 살던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으로부터 학문을 익혔고, 이시원이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에 의분을 못 이겨 자결하자 그 충절을 기려 실시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게 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창은 정치보다 학문과 문장에 더 뛰어났던, 조선조가 자랑하는 마지막 학자요 문장가였습니다. 서장관으로 청에 따라온 그의 문장력에 청 관리들조차 “그대에게 내 자리를 내줘야 할 판”이라며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비문까지 미리 써 두었지만 이건창은 시문집 명미당집(明美堂集)에 스스로를 회고하는 시문집 서전(詩文集 敍傳)을 남겨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자신의 일생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시문에 관한 자신의 의견,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와 소회도 밝히고 있습니다. 글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은 무서울 정도로 엄격한 ‘의로움’입니다.


이건창이 글벗의 청에 못 이겨 밝힌 작문의 기본은 이 시대에 들어봐도 오뉴월 몽롱해진 머리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버쩍 들게 됩니다. “마땅히 삼가 사양해야 할 일이나 그 또한 청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되는지라 경험을 들어 고명에 보답한다”며 그는 이렇게 문장의 규범을 밝히고 있습니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뜻의 뼈대를 얽어야 한다. 또 문장에 그 뜻이 관통하게 하여 분명하고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쓸데없는 말은 피해야 하고 속어 사용은 꺼릴 이유가 없다. 오직 바른 뜻을 놓쳐버리는 일, 하고자 하는 말을 빠뜨리는 일을 염려해야 한다.

문장에 세우고자 하는 ‘주된 뜻[主意]’이 있다면 반드시 이에 ‘대적하는 뜻[敵意]’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적하는 뜻’으로 수차 공격해도 ‘주된 뜻’이 꺾이지 않아야 그 뜻이 더욱 확고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둘 사이에 현격한 우열이 없다면 훌륭한 글이 될 수 없다. 마땅히 둘 다 버려야 할 것이다.

뜻이 확립되고 나면 말을 다듬어야 한다. 자기의 말은 쉽게 해 의혹됨이 없게 해야 하고, 남의 말은 근거를 밝혀 혼란됨이 없게 해야 한다. 말에 싣고자 하는 뜻과 뜻을 담고자 하는 말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뜻에 말이 맞지 않으면 옹졸하게 되고, 말에 뜻이 맞지 않으면 어지럽게 된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어찌 내 글이 잘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지은 글을 던져서 마음에 두지 말고 며칠이 지나 글에 대한 정을 씻어버린 후 남의 글처럼 엄정히 본다면 옳고 그름이 바르게 보일 것이다. 그때도 그른 것이 보인다면 버리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창은 “글을 많이 읽고 써보는 것 외에 작문의 비법은 없다”고 말합니다. 또 “많이 짓는 것은 많이 고치는 것만 못하고, 많이 고치는 것은 많이 지워버리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세상 일을 전폐하고 문장에 전념해야 한다”는 그 앞에서 더 이상 논할 말을 잊게 됩니다. 그가 세운 엄한 기준을 생각하면 함부로 글을 쓴다고 말하는 일조차 두려워집니다.

한때 대학입시 때문에 학원가에 논술 바람이 인 적이 있습니다. 이건창의 문장론은 논술이든 시작(詩作)이든, 또는 산문을 짓든 실용문을 쓰든, 글을 공부하려는 모든 이들이 금과옥조로 새겨둘 만한 문장의 참 규범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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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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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문전에도못가본내신세 (210.XXX.XXX.103)
서양식 표현으로 하면 문제가 없을 듯도 합니다만...튜더 왕조...합스부르크 왕조...그런데 이씨 조선이란 표현만은 유독 일본이 고의적으로 폄하하여 칭한 표현이라고 들었습니다.
조선조 왕권은 우리 역사상 가장 취약했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변신한 유교의 폐해 때문이죠..방선생님의 의견처럼 왕조가 빨리 사라졌다고 가정해도 유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면 이 나라 역사가 달라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 등 온갖 개혁을 추구할 때도 상상을 못할 정도의 반대와 방해 작업에 부딪쳐 그 분의 높은 뜻을 다 이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물론 강력하지 못한 왕이 재임하여 정치,사회의 공동화 현상이 지속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왕들이 사대부 사색당쟁의 와중에서 휘청거렸으며 온갖 사화 사건 또한 바로 탁상공론 부패무능한 양반 계급인 사색당쟁의 집단 이기주의의 발호가 원인이었습니다....현자적(far-sighted) 인물 즉 실학파들과 정조 등 개혁가들이 수 백 년 잘못된 구습과 무사안일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라를 제도적으로 고쳐 보려고 시도하여 보아도 완강하고 조직적인 보수 세력의 철통같은 저항에 부서지고 또 부서졌을 뿐입니다. 왕권이나 권위가 허수아비에 가까운 상태까지 갈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충절과 효,절개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행하라 가르친 공자의 사상은 조선 땅에 와서 그 원 취지를 상실하였던 것입니다. 요즘 예수님의 사랑,나눔,포용,평등 사상은 지하실에 쳐 넣어 버리고 오로지 기복 신앙과 집단 이기주의로 변태적 양상을 띄고 있는 한국식 기독교 신자들의 생활과 너무나 흡사한 양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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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15: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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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211.XXX.XXX.199)
역사는 발전하는 게 아니라 반복된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꼭 그런 건도 아니겠지만.
이씨조선의 말로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기도 하지요. 엉뚱하게도 이씨의 조선왕조 지배가 너무 길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개국 백 년만에 연산군이 나라의 기틀을 흔들고 그 백 년 후 임란을 당하고, 곧이어 호란까지 겪고. 게다가 왜란의 치욕을 씻기는커녕 그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뺏겼으니 다른 왕조로 대체됐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망상조차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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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13: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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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문전에도못가본신세 (210.XXX.XXX.104)
고종과 민비에 대한 평가와 자료들을 몇 번 읽은 기억이 있어 나섰을 뿐입니다. 고종과 민비가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고 과감히 시도하려고 열정적으로 나섰을 당시는 이미 국운은 일으키기에도 힘들게 기울고 있었고 현실을 제대로 파악못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떼인 보수 세력의 방해 작업까지 겹쳤답니다. 고종 부부가 서구 문화와 문물의 도입만이 개혁이 가능함을 깨닫고 그 기초 공사를 위해 영어 교육 등 언어 교육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며 인재 양성을 위한 유학 준비까지 계획하였으나 보수 세력과 우민들은 왕 내외의 열정과 꿈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영어 교육을 하기 위해 마련한 학교(한국에서 최초의 영어 원어민 교사까지 초빙)에 등록된 양반족 자제들이 종들을 달고 와서 책을 넘기는 일까지 시키는 등 구태의연한 사고와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으며 외국어 학습에는 의욕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한자만 배울 가치가 있고 한문만이 배워 익혀야 할 학문이라는 틀에서 못 벗어날 정도로 지도층 인사와 자제들 까지 고종 내외의 개혁이란 사고가 사실상 무시당하였던 것이죠...이미 조선을 강점하려는 야욕을 착착 진행중이던 일본은 조선의 개혁이나 자주 독립을 용납할 의도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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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11: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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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211.XXX.XXX.199)
내신? 이름이 길어 끝 두자로 대신해도 좋을지요? 말씀에 상당히 공감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솔직히 아직 덜 이해되는 부분도 있고요.
제 짧은 소견으로도 흥선이나 민비가 모두 나라를 말아먹으려던 건 아니었지 싶습니다. 흥선이 매관매직 일삼던 김씨 세력을 밀어내고 조정의 권위를 세우려던 거나 민비가 개혁의 뜻을 세운 거나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다만 둘의 지나친 경쟁과 외세를 이용하려던 계획이 어긋나 낭패스런 일을 당했지요. 흥선의 쇄국과 당백전 발행은 무모했고, 민씨 일가의 치부는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서로 길게 나누며 논박도 하고 이해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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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17: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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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문전에도 못 가 본 내 신 (210.XXX.XXX.103)
특히 일본은 민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조를 강점하면서 자국이 저지르는 제국주의적 침탈을 합리화하고 조선조 신민(?)들을 무마하기 위하여 조선조 역사를 왜곡하고 왕조를 비하하는 역사 조작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해방후 일본식 역사관을 벗어난 학자들은 역사 왜곡의 심각함을 알고 있어 아주 조심스럽게 조선조 역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임진란시의 선조에 대한 인물관은 의견이 분분하지 않으나 고종에 대해서는 일본 역사 또는 해방후 일본식 역사 교육을 받아 온 사람과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 냉철하게 쓴 역사 속 인물평은 상당히 다릅니다. 특히 마지막 황조에서 고종과 민비를 가까이에서 보좌하거나 지켜 본 외국인 선교사,사업가,학자들의 평은 일본이 우리에게 주입하여 온 것과는 사뭇 다른 면이 보입니다. 고종은 무능하긴 커녕 상당히 영민하고 독립적이며 개혁을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 합니다. 구습과 구태의연한 사고에 사로잡힌 기득 유생 출신 조정의 보수파와 일본의 방해 작업으로 좌절되었을 뿐이라고 하며 민비도 일본이 온갖 폄하 작업과 악성 유언비어로 탐욕에만 사로잡힌 엽기녀로 변색되어 있으나 클레오파트라와 시저의 애정 관계처럼 남편인 고종과 정신적,지적으로 아주 돈독한 관계에 있었으며 개혁과 진보에 유난히도 관심과 열정을 보인 여걸이었다고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사가의 사관에 달라 보일 수도 있으며 특히 정치적 의도로 윤색된 역사일수록 왜곡되거나 진실이 호도될 위험은 더욱 커진다는 점을 잘 알고 계실 것이라 믿지만 다시 한 번 더 밝혀 둡니다. 제 어머님 세대가 지금까지도 믿고 주장하고 있는 민비에 대한 해괴한 소문과 고종에 대한 진실 그 이상의 나쁜 이미지는 바른 역사관을 가진 우리의 역사가들의 역사론이나 인물평이 아니라 민비 시해와 조선 점령을 합리화하려는 일본의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역사 왜곡의 극치임을 명심하시길 앙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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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15: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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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문전에도 못 가 본 내 신 (210.XXX.XXX.101)
아래 댓글만 보면 제가 한자를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것 같을 수도 있지만 사실 전 컴맹이고 아깐 컴 기본 수업 중 올린 것이었습니다. 한자를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법을 배우긴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을 뿐 우리 세대 이상의 능력은 있습니다. 오랜 세월 신문과 잡지의 정치,문화,사회면을 철저하게 읽은 이력 때문이죠..뜻도 제대로 파악못하면서도 노자,장자,묵자,한비자에 대한 글을 읽고 이해하려고 몸부림친 경험 때문이기도 하고요...로마,그리스 문화가 이집트가 그 모태이듯 아시아 문화도 한자권에서 자랐으니까요...15 년 전 중국 여행 중 아무리 해도 안되던 대화가 종이 한 장 얻어서 한자로 시작하니 가능하였던 기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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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12:3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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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fseoul (61.XXX.XXX.57)
글을 써보겠다고 덤비는 제 마음을 숙연케 만드는 선인의 좋은 교훈이 담긴 글 감사합니다.
비슷한 정신으로 노력해 왔으나 이제 더욱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겠구나 하고 명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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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11: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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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문전에도 못 가 본 신세 (210.XXX.XXX.104)
우리의 문학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한국 문학과 그 역사에 대해 이설이 분분합니다..한국 문학사를 한글 창제 이후로 해야 하냐? 한글 작품만 순수한 한국 문학 범주에 넣어야 하나? 그렇게 되면 너무나 한국 문학이 일천하고 그 범주가 좁아지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죠....뿐만 아니라 한글 창제 이전 문학 작품은 몇 편 남아 있지 않고 거의가 구비 문학 정도에 불과한 것도 바로 우리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아무튼 우리 한글 창제사의 비화와 창제 후 자칭 지식인 그룹(대부분의 조선조 양반족과 일제 강점기에도 한자 만능주의에 집착했던 이들)의 우리글 폄하 내지 무시함은 결국 우리 글과 문학의 오랜 암흑기를 낳았고 나아가 문화와 정치,사회,경제 등 사회 전반 구조의 후진성으로 결국 일제 강점기를 불러 온 간접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조선조 학자 등 특권계급들의 정신적인 종주국인 중국(청나라)의 부패무능한 정권과 운명을 같이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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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10:5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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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문전에도 못 가 본 신세 (210.XXX.XXX.104)
우리의 종주국인 중국의 위대한 한자와 위대한 문장이 있는 마당에 왜 글자를 새로 만들어야 하느냐였죠....결국 사대주의에 병들고 특권의식(계층 형성과 의식)에 사로 잡힌 양반족들은 한글은 아녀자(여자를 하시하는 사고와 호칭)들이나 상것들이 사용하는 글로 치부하고 한자로 된 글과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요즘 한국의 상당수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자신의 학벌과 지위에만 연연하고 학문이나 시대사조에는 떨어지면서 특권의식과 편협한 사고에서 못 벗어나는 것과 너무나 흡사한 현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자신은 사대부 집 정실 자식이며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을만큼 박학하면서도 풀뿌리들이 읽을 수 있는 홍길동전을 한글로 쓴 허균은 조선사의 인걸이요 드문 개혁자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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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09: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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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211.XXX.XXX.199)
애석하게도 이건창의 문장은 한문이었습니다. 주시경 선생과 조선어학회가 일제 탄압을 받으며 우리 말본을 세우기 이전 우리네 학문은 한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나 어떤 장르에서든 어떤 언어로든 문장의 기본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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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7 19:4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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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회 (119.XXX.XXX.228)
뜻을 확립하고, 말을 다듬고, 뜻과 말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그런데 이분은 글을 한문으로 적었나요? 이런 분들이 한글로 글을 썼다면 우리말과 글이 훨 다듬어졌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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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7 18:3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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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23.XXX.XXX.28)
그러다보면 이건창이 말한 작문의 기본이 몸에 익게 되겠지요. 글쓰는 사람들에게 주는 참으로 유용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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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7 13: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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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99)
이건창의 글쓰기 기본을 날마다 읽고 익혀 구체적인 글쓰기 기본으로 다질 수 있게되어 기쁩니다.
좋은 글 읽게해주신 것 또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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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7 11: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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