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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방남(반야월)과의 만남
황경춘 2009년 03월 28일 (토) 07:48:37
초기 치매 환자의 기억력 회복에 음악요법(music therapy)이 좋은 효과를 올린다고 합니다. 일본의 한 노인 요양소에서 자기가 다닌 초등학교 교가를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한 할머니가 몇 번의 음악요법 끝에 교가를 그것도 3절까지 기억해내었다고 합니다.

곡이 없는 시보다 노래 가사 쪽이 확실히 기억하기 쉬운 모양입니다. 저도 어릴 때 배운 노래 가사를 지금껏 외우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수학의 공식이나 역사의 연대와는 달리 입에 올리는 기회가 많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팔십대 후반에 들어선 지금에도 이런 식으로 아직도 대충 기억하고 혼자 낮은 소리로 불러보는 옛 유행가 진방남(秦芳男)의 ‘고향만리 사랑만리’도 그중 하나입니다.

일제치하 1930년대 말엽 시골집에 유성기가 있었으나 선친이 좋아하신 임방울 국창 등의 판소리 레코드가 주종이어서 중학생이 되어서도 별 관심은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방학 집에 돌아온 저는 레코드 케이스에 ‘고향만리...’ 판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진방남은 ‘불효자는 웁니다’ ‘세세년년’ 등 노래로 이미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히트곡이 아닌 ‘고향만리...’가 케이스에 들어 있는 것이 퍽 이상했습니다.

어쨌거나 덕분에 긴 여름 방학 중 이 ‘고향만리...’ 판은 실컷 들었습니다. 당시의 스타 가수 남인수 백년설만큼 미성은 아니지만 차분한 저음으로 시작하여 염세주의가 곳곳에 스며있는 가사를 구수하게 처리하는 진방남의 노래에 푹 빠졌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저는 서울에서 언론계에 몸을 담아 매일을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식사에 불렀습니다. 한국화약의 김종희 사장도 계셨습니다.
소공동에 있는 생음악이 있는 가건물 비슷한 양식당이었는데 식사 도중에 계수남 씨가 나타나 기타인지 아코디언인지를 직접 연주하며 국내외 노래를 몇 곡 불렀습니다. 그중 하나가 당시 많이 유행하던 ‘세월이 가면’(박인환 시, 이진섭 곡)이었습니다.

계수남 씨의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제 머리엔 문득 20여 년 전 진방남 씨의 ‘고향만리...’ 곡이 떠올랐습니다. 한쪽은 이진섭 특유의 발라드 곡 한쪽은 전형적 유행가인데도 두 사람의 음색이 많이 닮았고 수심(愁心)이 깃든 노래 분위기가 저를 추억 속으로 끌어넣는 데 충분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동안은 ‘고향만리...’ 노래가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사는 1절과 2절 3절이 뒤범벅이 되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낯선 ‘세월이 가면’ 보다 훨씬 가까이 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몇 년 뒤 모 스포츠신문이 연예면 인터뷰 기사에서 우리 가요계를 주름잡는 반야월이 광복 전 가수 진방남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6.25 때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비롯하여 그가 작사한 수많은 노래들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접하면서 광복 전 그가 부른 노래들에 대한 향수도 함께 느꼈습니다.

금년 8월에 만 아흔셋이 되는 반야월 선생이 아직도 가요계와 후진들을 위하여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기사를 얼마 전 읽고 불현듯 그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2년 전에 그가 창립한 ‘가요사랑 뿌리회’의 월례 모임이 있다는 제1월요일 오후를 택해 인현동의 어느 지하다방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후배들과 뭣인가를 상의하고 있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그 분위기에 끼어들 기회를 놓쳐 저는 사흘 후 약속 없이 다시 그 다방을 찾았습니다.

초면인 제가 불쑥 자기소개를 하고 광복 전 ‘고향만리...’를 애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퍽 반가워한 그는 노래 한 구절을 낮은 목소리로 불러 보기도 했습니다. 일제 암흑시대에 검열관과 싸운 이야기, 이애리수 여사가 단성사에서 ‘황성옛터’를 3절까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부르자 청중이 다 일어서 합창을 하는 바람에 임석 경관이 놀라 호루라기를 불며 공연을 중지시킨 일화 등을 들려주었습니다.

광복 전부터 가요계에서 활약하다 고인이 된 54인의 추모제를 2년 전 폐가 된다고 유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뿌리회’에서 단성사 근처 절에서 가진 뒤 작년에는 현인 박재홍 두 사람을 추가한 56명의 추모제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금년에도 모실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앞서 말한 이애리수 여사는 금년 100세인데 현재 병석에 계신다고 걱정까지 했습니다.

귀가 약간 어두우나 대화엔 지장이 없고 지금도 대중가요 단체 서너 곳에서 후배지도와 저작권보호 운동 등에 열정을 쏟고 있는 그는 아직도 가요 작사에도 도전하고 있다니 그의 초인적 모습은 저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약 30분 이야기를 나눈 후 “종종 들러요”하며 꼭 쥐는 그의 손에는 젊은이에 못지않은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마침 비 오는 날이어서 한 손엔 우산을 한 손엔 코트를 들고 다방을 나서려는 제 등 뒤에서 “문 좀 열어드려”라고 다방종업원에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시골 할아버지 같은 정감을 느꼈습니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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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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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fseoul (61.XXX.XXX.81)
글 감사합니다. 고국을 떠나 얼리 타향에서 옛일을 회상하시는 마음 알고도 남습니다.
이종완 선생처럼 저도 그 문제에대해 걱정이 많았습니다만 인터넷이 생긴 후 그 방면에
노력하시는 분이 관민 간에 많은 걸 알고 마음 든든합니다. 그래서 저도 보탬이 될까 해
이것저것 써보기도 합니다. 두 분 건강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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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30 12: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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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자 (119.XXX.XXX.228)
마치 저의 아버님을 만남 느낌이 듭니다. 저의 아버지와 연세가 비슷하신것 같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계십니다.
그렇지만 지금 살아 계셨으면 80세가 넘으셨지요. 그리고 아주 옛날 가수들은 잘 모르지만 제가 어렸을때의 기억으로는 "현인" 씨의 얼굴은 기억할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막걸리 한잔 드시면 현인씨의 노래라든가 옛날분들의 노래를 좋아 하셨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워싱턴에서 조형자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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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8 17: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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