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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 얽힌 추억
황경춘 2009년 03월 14일 (토) 08:13:50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노래는 당시의 세태를 민감하게 반영합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 즐겨 부르던 노래에 얽힌 추억 한두 토막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추억의 노래는 Paul Anka 의 'You Are My Destiny' 나 Beetles 의 ‘Yesterday' 아니면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나 양희은의 ’아침 이슬‘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엔 그게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고 이규남의 ’진주라 천리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제강점 때 당시의 중학교(현재의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1938년, 그러니 일제의 동북아시아 침략의 야욕이 극에 달하여 만주에 괴뢰정권을 수립한 다음 본격적인 중국본토 침략을 위한 정식 선전포고를 내린 바로 다음 해였습니다.

일반인 가정 구석구석에까지 파고들어온 일본 군국주의의 전시통제 속에 식량과 생활필수품까지 달려 국민의 생활은 점점 쪼들리기 시작했고 혹심한 군사훈련과 근로동원에 시달린 젊은 학생들의 태반은 정신적으로 자학(自虐)과 허무주의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골서 올라와 하숙집을 전전하며 제가 다닌 학교는 서부 경남의 소도시 진주에 있었으며 이곳은 역사적으로 평양과 더불어 이름 난 색향(色鄕)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적장(敵將)의 목을 안고 남강(南江)에 뛰어든 의녀(義女) 논개 이야기로 알려진 이곳엔 당시에도 전통적인 기생 권번(券番)이 있었으며 요정과 술집들이 전쟁 분위기 속에서도 어렵게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숨 막히는 환경에서 유일하게 우리들의 마음을 달래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당시 유행가라고 불린 지금의 대중가요였습니다.

특히 1937년에 진주 출신 남인수가 불멸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으로 등장한 뒤의 이곳은 밤이 되면 전시색깔 일변도의 낮과는 다른 분위기의 도시로 변해 유흥가에서는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기도 했습니다. 호기에 넘친 상급생들이 야간에 변장을 하여 이런 곳에 출입하다 적발되는 일이 많았고 우리도 상급반이 되자 동기생 중에 그런 친구가 몇 명 생겼습니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만은/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이라고 시작되는 감미로운

‘애수의 소야곡’ 멜로디는 남인수의 미성으로 사춘기의 우리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 했습니다. 학생의 신분으로 유행가를 부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그 노래를 몰래 배우고 나중에는 초등학교 때 배운 하모니카로도 불렀습니다.

이 밖에 그 당시 많이 유행한 노래로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고복수의 ‘타향살이’ 그리고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등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와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의 애절한 곡도 좋아했습니다.

이 노래들 속에는 단순한 사랑과 젊음의 찬미 외에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워하고 나라 없는 민족의 슬픔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많았고 멜로디도 현재의 뽕짝과는 달리 왠지 모르게 센티멘털하게 젊은이의 마음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활약하던 분으로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반야월(93) 선생은 당시의 유행가는 일종의 ‘저항 노래’였다고 규정지었습니다. 실은 제 시골집에 이 반야월 선생의 ‘고향 만리 사랑 만리’라는 음반이 있어 다른 사람은 별로 부르지 않던 이 노래를 퍽 좋아했습니다.

“무리진 달밤아/천길 만길 깊은 달밤아”로 시작되어 “산이 만리 물이 만리 휘파람 신세/오늘이 내일이냐 내일이 오늘이냐”로 맺어지는 이 노래의 허무주의적인 분위기가 차분하게 전개되는 멜로디와 잘 어울려 제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1939년에 진방남(秦芳男)이란 예명으로 데뷔해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지금도 때때로 불리는 명곡을 히트시킨 박창오(朴昌吾)씨는 광복 후 작사가로 변신하여 반야월(半夜月)이란 이름으로 ‘단장의 미아리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 ‘소양강 처녀’를 비롯한 수많은 히트곡을 탄생시켰습니다.

1941년에는 ‘진주라 천리길’이란 진주를 무대로 한 노래가 나와 진주 젊은이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이 노래엔 특히 1절과 2절 사이에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가/연자방아 돌고돌아 세월은 흘러가고 인생도 오락가락...“이라 이어지는 달콤한 대사가 인기여서 레코드판에 끼어있는 가사를 베껴 암기하느라고 법석을 떨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전국(戰局)이 점점 기울어지고 세상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지자 이러한 ‘퇴폐적’인 유행가는 거의 전부가 금지곡으로 묶여 공개된 자리에서는 이 노래들을 부를 수 없는 암흑시대가 곧 뒤따랐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1945년 8월 광복의 기쁨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습니다.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사랑을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란 달콤한 장세정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온 것은 얼마 뒤 이야기입니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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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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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10.XXX.XXX.19)
선생님, 노래에 얽힌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음악칼럼을 쓰셔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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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4 11: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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