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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뺏긴 역사를 되새기며
황경춘 2009년 01월 31일 (토) 01:48:18
얼마 전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서울을 방문할 때 일본의 유력 언론들은 한때 중단되었던 한일 간의 소위 ‘셔틀외교’의 부활이라고 그의 방한에 큰 의미를 실어 보도했습니다.

이때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적인지 일본의 유력 매체는 거의 예외 없이 우리로서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1910년의 경술국치에 언급하며 명년이 그 “일한합병의 100년이 되는 해”라 언급했습니다. 몇몇 신문사설에서도 이 점을 지적한 것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물론 25, 50, 100 등 매듭 숫자를 좋아하고 무슨무슨 날이라고 기념일 많기로 유명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설마 ‘조선반도 식민지화 100주년’을 기념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8ㆍ15를 ‘종전(終戰)의 날’이라고 부르며 ‘패전’이라는 말을 결코 쓰지 않는 자존심 강한 일본인이지만 아무러면 그런 비열한 생각은 갖지 않겠지 라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약 1세기 전, 즉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10여 년 간에 한일 두 나라가 뒤얽힌 격동의 사실(史實)들이 주마등 같이 머리에 떠올라 한동안 이것저것 생각에 잠겼습니다.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촉발한 세계적 대공황의 영향으로 우리 국가와 백성의 살림살이가 급격히 궁색해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진성을 벗지 못한 일부 정치인의 추태로 많은 국민이 분통을 참지 못하고 있는 요즘, 혹시 우리는 나라의 장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여유마저 잃어 버린 국민이 되어 버리지나 않았는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못지않게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경제도 지금 굉장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극우 보수주의에서 마르크시스트 공산주의까지 정치사상의 스펙트럼이 우리보다 훨씬 넓은 일본 정계는 2년 동안에 총리가 세 번이나 바뀔 정도로 불안하고 여야의 대결도 치열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우리와 같은 의사당 폭력이나 난동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라의 운영에 어딘가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정치 싸움의 와중에도 중동 가자지구의 난민에 구호물자를 보내고 지구온실가스 측정을 위한 위성을 성공적으로 쏘아 올렸으며, 국회에서는 그렇게 첨예하게 대립해온 경제 살리기 추경예산안을 표결할 때 야당은 난동 대신 조용한 퇴장 또는 반대표로 의사표시를 했습니다.

때마침 민족의 명절 설을 맞아 1세기 전 오욕의 역사 현장이었던 경복궁의 일부 소실되었던 건물이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일본군 헌병과 그들의 후원을 받은 ‘정치낭인’들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된 명성황후의 거처 건청궁(乾淸宮)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방된 날, 마침 아침에 내린 눈이 곱게 쌓인 건청궁엔 싸늘한 날씨에도 일본 중국 등지에서 온 외국관광객을 포함해 많은 관람객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람객들은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복원되기 전에 이곳 근처에 있었던 명성황후의 초라한 사당은 없어지고 그때 같이 있었던 시해에 관한 자세한 설명판도 안 보였습니다. 외국 관광객에 대한 배려 때문일까요?

가장 최근의 인구통계에 의하면 광복 전 일제식민통치 말기의 참혹상을 기억할 만한 생존자 중 현재 남한에 거주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 약 4,700만 명의 3%정도가 되겠습니다. 이 얼마 되지 않는 분들마저 세상을 떠나면 일제의 잔인무도한 식민정치는 기록으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인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자기네들이 참패한 전쟁의 아픔도 두 번에 걸친 원자폭탄의 피해상도 기록으로나 영상으로 심지어는 체험담 녹음으로까지 남기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옛 일을 퍽 너그럽게 잊고 지내는 편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어두운 과거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미래지향에 장해가 되겠지요. 그러나 과거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건전한 미래를 준비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옛 선현이 가르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슬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동경도지사(東京都知事)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는 “북한은 중국에 합병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미국도 아마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르며 중국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 한국은 물론 반발하겠지만 한국만 동의하면 북한은 자연히 붕괴하고 시민사회가 부활될 것이라는 망언을 폈습니다. 사석이 아니고 동경에 있는 외신기자클럽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에 관해 연설할 때 한 말입니다.

원래 소설가인 그는 정치가로 변신해 1999년부터 3기째 동경도지사에 당선돼 근무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을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대표적 우파 지식인으로 알려진 그는 여러 번 외국에 관련된 망언사건에 휘말린 과거가 있습니다.

이에 앞서 일본 공군자위대 참모장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 대장은 “태평양전쟁은 일본이 연합군의 꾐에 빠져 참전한 것으로 일본은 침략국가가 아니었다”는 논문을 써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일본 방위성은 징계처분하는 대신 7,000만 엔의 퇴직금까지 주어 명예제대시킨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소 총리의 일본내각에 보수파 인사가 많고 일본 국내에서 우경화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우려할 사태에 별 관심을 쏟지 않았 으며 오로지 독도 같은 영토문제가 제기될 때에만 반사적으로 반짝 반응을 보일 뿐 지속적인 정신무장에는 좀 소홀하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고루한 민족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100여 년 전 국론의 분열과 이기심으로 35 년 동안이나 나라를 빼앗긴 우리는 그 쓰라린 과거에서 교훈을 찾아 전철(前轍)은 밟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것입니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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