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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방석순 2009년 01월 12일 (월) 08:53:36
묵은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한다는 지난 세밑의 일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미술을 전공하는 이의 자조 섞인 넋두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공부하고 많은 실험을 하고, 그래서 탄탄한 실력을 갖추어 누구보다 패기만만할 그의 가슴에 그같이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처녀시절 법정(法頂)의 수필집 ‘무소유(無所有)’를 끼고 다녔답니다. 총각이 처음 방문했을 때 처녀 방에서는 분내가 아니라 거기 덩그렇게 놓인 소나무 의자의 솔 향만 가득하더랍니다. 그러던 처녀가 결혼하고 나자 ‘줌마’가 되어 생수병 모으고 페트병 끌어들이며 욕심부리기 시작한 것은 오로지 무능한 남편 탓이라며 자탄했습니다.

또 자신이 ‘빈처(貧妻)’의 주인공처럼 안개만 찾으며 무능하게 살아온 것은 결국 가난해도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멋지게 보이도록 잘못 만들어진 국어책 내지는 소설의 환상에 빠졌던 탓이라고 자조했습니다.

예술의 고장 파리에서 십여 년 간 유학하며 여러 차례 전시회도 가지고 ‘이만 하면…’, 하산을 결심하고 떠날 때처럼 설렘을 안고 돌아왔었겠지요. 그러나 지금 그는 한낱 몇몇 대학을 오가는 ‘보따리우스’(강사)일 뿐이라며 자학하고 자신의 예술 인생에 회의(懷疑)합니다.

아직도 미몽(迷夢) 속에 미대(美大)에 진학한 젊은 영혼들을 교단에서 만날 때마다 그는 모골이 송연하다고 말합니다. 불가(佛家)의 ‘크게 버린 사람이 크게 얻는다’는 경구도 ‘크게 가져 본 사람만이 크게 버릴 수 있다’로 고쳐져야 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가져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무슨 버릴 것이 있겠느냐며.

미술은 아득히 멀게만 생각되던 세계입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창피해 공책을 감춰 다니던 저로서는. 그러나 세밑의 심란함 가운데 전해들은 그의 넋두리가 영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엄청난 수강료를 받아 챙긴다는 어느 미술대학 근처 학원가의 뉴스까지 함께 뒤섞여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맴돕니다.

설마 그가 후배와 제자들에게 예술의 길을 포기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겁니다. 현실의 고단함에 잠시 지인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은 것뿐이겠지요. 그런데도 왠지 그에게 무슨 위안이라도 전했으면 하는 조바심을 느낍니다.

젊은 시절 전시회 출품에 딱지맞고 빵을 얻기 위해 길거리서 싸구려 누드를 그렸다는 밀레, 쉬 상처받는 성격으로 죽을 때까지 가난과 고독과 정신 장애와 싸웠다는 고흐…미술학도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역경 속의 천재들이 생각납니다. 작업실 한 간 마련할 길이 없어 침대 밑에 기어들어가 글을 썼다는 어느 여류문인, 어두컴컴한 이국의 감옥에서 별만 헤다 숨져간 시인도 생각납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내 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주리자
-만이십사년일개월을/무슨 기쁨을 바라 살어 왔는가 -‘참회록’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와했다 -‘서시(序詩)’

후쿠오카의 어두운 감방에서 스물일곱 나이에 숨진 시인은 그 짧은 생애에 무얼 그리 참회할 게 있었을까요. 병상에 누워 있던 어머니, 아직도 어린 아우들, 차표까지 끊어놓고 끝내 찾아가 보지 못한 고향 북간도, 그리고 잃어버린 나라…그런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서 윤동주는 우리들 마음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시를 새겨 놓았습니다.

청각을 잃은 후에야 천상의 소리를 들었다는 베토벤도 생각납니다. 과연 그가 세속의 안락과 영화에 물들었다면 그토록 깊은 신(자연)과의 교감을 이루었을까요. 또 다시 로망 롤랑의 표현을 빌린다면, 더 이상의 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가장 불행했던 베토벤의 영혼만이 숱한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위대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마태복음 5장 3절),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우니라(마태복음 19장 24절)’.

가끔 후배들에게 들려주던 훈계가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신문사 들어온 거야? 꿈 깨라. 그러려면 일찌감치 종이장사라도 하는 게 낫다. 신문사에선 보람으로 일하는 거야. 내가 쓴 기사가 어디 누구에겐가 도움이 될 거라는.”

허세부리고 거들먹거리려면 신문·방송사를 찾지 말고 아예 그 좋은 머리로 여의도에 가서 누군가의 ‘가방모찌’하는 게 나을 겁니다. 양주 마시고 골프치고 싶다면 역시 돈 잘 버는 금융회사나 대기업 문을 두드릴 일입니다.

그럼에도 신문·방송 경력을 밟고 정치꾼이 되겠노라고 공공연히 밝히는 후배들을 보면, 입사 두어 해에 벌써 길을 걸으며 골프스윙을 흉내 내는 후배들을 보면 정말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과연 기름진 배로, 탐욕이 가득한 눈으로 이 세상의 밝은 곳 그늘진 곳을 옳게 보고 바르게 듣고 제대로 쓸 수 있을까요?

물질로는 결코 정신의 풍요를 이룰 수 없는 것. 그러니 시인, 작가, 화가, 조각가, 연극인, 음악가…무릇 예술을 하는 이들이여. 길이 심신의 가난함을 누리시라. 끝없이 고뇌하고 절망하고 자신이 진실로 올바르게 제대로 선택한 고난의 길을 축복하시라.

행여 당대에 닥칠지도 모를 부와 명예를 부디 경계하라. 가을하늘처럼 맑았던 정신, 눈꽃처럼 아름다웠던 영혼이 빨려 들어갈 블랙홀일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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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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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순 (61.XXX.XXX.63)
어느듯 방선생님의 글 팬이 된 듯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글방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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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3 09: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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