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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마다 안될 때 -『돈키호테』
김이경 2008년 12월 09일 (화) 00:17:01
새해를 맞으면 잊지 않고 꼭 하는 일이 있습니다. 새 수첩 맨 앞장에 새해의 다짐을 적는 겁니다. 올 초에도 ‘화 내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몇 가지 과제를 적어두었지요.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수첩을 펼칩니다. 수행 평가 시간입니다. 화 내지 말자는 결심은 아무래도 60점을 넘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행히, 함께 적었던 다른 과제들은 얼추 해낸 것 같습니다.

문제는 해냈다는 기쁨이 무색할 만큼 차디찬 세상의 평가입니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데드라인을 정해 스스로를 채근하며 이룬 일들에 대해 세상의 시선은 냉정하기만 합니다. 설레며 시작했던 도전이 실패하고 거절이 거듭됩니다. 아는 이들의 격려와 위로에 기대던 마음에도 구멍이 뚫립니다. 상처엔 딱지가 앉건만 거절엔 왜 면역이 안 되는지….

어느덧 모든 게 다 의심스러워집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도, 자신의 능력도, 오랜 궁리 끝에 세운 그럴싸한 계획도, 커다란 포부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회의는 커지고 커져서, 격려해준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꾸려온 제 삶도 온통 못 미덥기만 합니다. “난 안 돼.” 자포자기의 한마디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 어금니를 꽉 깨물고 책을 펼칩니다. 포기를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 『돈키호테』1)입니다.

깡마르고 샛노란 안색의 돈키호테가 비루먹은 농삿말 로신안떼를 타고 고향을 떠난 것은 쉰을 코앞에 둔 어느 해 여름이었습니다. 방랑기사가 되어 거룩한 이름을 세상에 남기겠다는 푸른 꿈을 안고 떠난 길. 허나 그의 꿈을 믿고 지지한 이는 착하고 먹성 좋은 하인 산초 빤사뿐입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심지어 함께 사는 조카딸조차도- 기사소설에 넋이 나간 이 미친 노인네를 비웃고 동정할 따름이었지요.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돈키호테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남들이 뭐라든 자신의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력, 남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강한 독립성이 그것입니다. 물론 이로 인해 풍차를 거인으로, 양떼를 군대로 오인하는 판단착오도 종종 일으키지만 이 점에 대해서도 그는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겁에 질리면 결과적으로 감각이 흐려지고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법”이며, “(이상한) 사건은 모두 마법의 마력으로 벌어진 일들”이기 때문이란 거지요. 돈키호테는 우리가 보는 것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합니다. 또 음흉한 마법사들이 둔갑술을 써서 우리 눈을 속이고 있으니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엉뚱해 보이지만 가만 생각하면 영 틀린 말도 아닙니다. 물건 자르는 칼이 사람 쑤시는 무기가 되고, 세계를 잇는 인터넷이 가까운 관계를 단절시키고, 평화를 노래하는 종교가 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마당에 양떼가 군대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요.

신부와 이발사의 꾐에 빠져 닭장에 갇힌 돈키호테에게 산초는 아무래도 마법이 아닌 것 같다고 의심합니다. 그러자 돈키호테는 “내가 알기로 확실한 건 내가 마법에 걸렸다는 걸세. 생각을 이렇게 하면 내 마음이 편하고 좋네.” 하고 점잖게 산초를 타이릅니다. 늘 사물의 진실을 보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던 그이지만, 이렇게 가끔은 의심스런 현실에 한 눈을 감아버리기도 합니다. 현실은 때로 현실을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사실 돈키호테는 누구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입니다. 영원한 연인 둘시네아에게 온갖 찬사를 바친다 해서 그가 그녀의 실체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둘시네아는 너무 볼품없지 않느냐는 산초의 물음에 돈키호테는 말합니다. “나는 그 알량한 여자가 어떠하든 그저 아름답고 정숙하다고 믿으면 되는 일이야.” 시인들에게 사랑의 영감을 주는 가상의 여인이 필요하듯 자신에게도 용기와 덕을 일깨워줄 뮤즈가 필요할 뿐, 그녀가 실제 아름다운지 고귀한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지요.

흔히들 돈키호테를 두고, 물정 모르고 덤비는 인간, 과대망상에 빠져 좌충우돌하는 인간의 대명사처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환상성을 꿰뚫어볼 만큼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다만, 그가 남과 다른 것은 세상이 녹록치 않음을 알면서도 세상을 향해 도전했다는 거지요.

안타깝게도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싸움은 대부분 처참한 패배로 끝나고, 툭하면 이 사람 저 사람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지요. 세르반테스의 서술대로라면 그의 갈비뼈는 다 부러져서 성한 게 없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을 모릅니다. 짐 보따리를 잃고 절망한 산초에게 그는 말합니다.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란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네. 우리에게 일어난 이 모든 폭풍우 또한 날씨가 잠잠해지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징후이기도 한 걸세. 행운도 불행도 마냥 오래갈 수는 없어.”

지금의 불행이 다가올 행운의 전조라는 믿음. 어쩌면 그건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에 두 눈을 다 감지만 않는다면 이 정도 환상을 품고 세상에 도전한다 해서 뭐 그리 허물이 되겠습니까? 하는 일마다 실패는 했지만 아직 갈비뼈도 튼튼하고, 절망하긴 이르지요.

오십에 읽던 책을 덮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시골 양반이 있습니다. 불운에 덜미를 잡힌 것 같은 날, 저는 그가 부른 노래를 부릅니다. 부디 그 노래가 당신의 한숨도 날려주기를 바랍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견디고
바로잡을 수 없는 불의를 바로잡으려 하고
두 팔의 힘이 다 빠질 때까지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해 나아가는 것
아무리 멀고 희망이 없어 보여도
그 별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길이라오…
조롱과 상처로 가득한 한 인간이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어
닿을 수 없는 저 별에 이르려 애쓴다면
세상은 그만큼 밝아지리라. 2)


1) 여러 번역본 중 제가 읽은 것은 민용태 씨가 완역한 『돈 끼호떼』입니다만, 여기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돈키호테’로 표기했습니다. 다만, 다른 이름들과 인용문은 민용태 역에 따랐습니다.
2) 돈키호테를 모델로 한 영화 「라만차의 사나이」의 주제가 ‘The Impossible Dream'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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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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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211.XXX.XXX.183)
주부들이 중심이라 아드님이 오시기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양천시립도서관에서 매달 둘째 주 수요일 아침에 모입니다. 딱히 여자, 주부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니 관심이 있으시면 찾아주세요. 독서회 이름은 '글두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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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1 18:21:59
0 0
이동익 (211.XXX.XXX.24)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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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9 22:18:27
0 0
이창우 (211.XXX.XXX.24)
얼마 전에 뮤지컬 '돈키호테(Man of la mancha)'를 보았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그 음악과 노래들을 떠올려봅니다. 돈키호테가 사랑한 여인 '둘시네야'는 아름답고 숭고한 여인으로 그렇게 저도 기억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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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9 22:17:14
0 0
강성민 (222.XXX.XXX.90)
참 좋은 글이네요. 바쁘게 살다보니 누구글에 리플 달아본 일이 거의 없지만 좋은 글로 좋은 하루를 선물해주셔서 감사함에 의견을 올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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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9 09:5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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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211.XXX.XXX.189)
글에 설명 주를 달았는데 빠졌네요. 저는 여러 번역본 중 민용태 씨의 [돈 끼호떼]를 읽었습니다. 여기 인용한 원문과 고유명사 등도 이 번역본에 따랐습니다만, 돈 끼호떼는 독자들께 익숙한 돈키호테로 표기했습니다. 글 말미에 인용한 노래는 돈키호테를 소재로 한 영화 [라만차의 사나이]의 주제가 'the impossible dream'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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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9 09:30:27
0 1
돈키호테 (211.XXX.XXX.51)
'불가능해보이는 것'과의 싸움이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권태로울까요?
세밑에 꼭 읽어보아야 할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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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9 09:22:3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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