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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애를 찾아서 (하)
임철순 2008년 11월 10일 (월) 02:33:34

역사에 남는 이름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 무릉계곡의 무릉반석, 4,500여㎡(1,500여평)의 그 너른 바위에는 수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연암이 일찍이 “쓸데없는 관직”이라고 일갈한 바 있는 조선시대 討捕使(토포사) 무리의 이름이 가장 많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검찰 경찰 등 힘깨나 쓰는 사정기관 사람들입니다.

그 많은 이름 가운데 가장 크고, 멀리서도 한 눈에 띄는 이름은 兪漢雋(유한준)입니다. 兪라는 글자의 어느 획은 주먹이 들어갈 만큼 깊고 크고, 한 글자의 세로길이는 가랑이를 넓게 벌려야 될 정도입니다. 창애의 이름 윗 부분에는 兪漢謨(유한모)라는 작고 흐린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창애와 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1㎞ 정도 산으로 올라가면 가슴이 시원해지는 3단폭포 龍湫(용추)가 있고, 맨 아래 폭포 옆의 바위에 거의 2m 크기로 兪漢雋의 이름이 龍湫라는 글씨 옆에 또 새겨져 있습니다. 1797년(정조 21년) 12월, 삼척부사이던 창애 유한준이 용의 덕을 바라면서 폭포의 이름을 짓고 새긴 글씨입니다. 창애가 새긴 이름은 그로테스크하다 싶을 만큼 문자 그대로 宏壯(굉장)합니다. 삼척부사 재임기간은 1796년 7월부터 1798년 12월까지라는데, 이 지역에서 창애의 자취는 무릉계곡의 두 가지 외에 다른 것을 찾기 어렵습니다.

창애가 이렇게 바위에 이름을 새길 무렵 연암은 沔川(면천:충남 당진군) 군수(1797년 7월 부임)로서 천주교도들을 관대하게 다스려 ‘개과천선’케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두 분은 모두 蔭職(음직)으로 벼슬을 시작했지만, 주로 지방 수령을 맡았고 벼슬살이보다는 오히려 후세에 文名(문명)을 떨치고 싶어했습니다.

   
  ▲ 용추폭포의 유한준 이름
(마중물 네이버 블로그에서)
 
글이든 자신이 지은 금석문이든 남이 세워준 비석이든 이 세상에 무언가 남기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암은 安義(안의:경남 함양군) 현감(1792.1~1796.1)에서 물러난 몇 년 뒤, 그곳 사람들이 구리를 녹여 송덕비를 세우려 하자 “하인들을 보내 송덕비를 깨부숴 땅에 묻고 감영에 고발하겠다”고 해 중지시킨 일이 있습니다. 연암은 “이름이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랬던 연암도 이보다 근 20년 전 熱河(열하)에 갈 때 居庸關(거용관)과 山海關(산해관)의 중간인 중국 동북부의 험난한 요충 古北口(고북구)를 지나면서 장성의 벽에 붓으로 ‘建隆(건륭) 45년 庚子(경자) 8월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라고 쓴 일이 있습니다. 마시다 남은 술을 쏟아 먹을 갈고 별빛을 등불 삼아 이슬에 붓을 적셔 자신의 흔적을 새겨 넣었습니다. <열하일기> 중 ‘夜出古北口記(야출고북구기)’는 滄江(창강) 金澤榮(김택영ㆍ1850~1927)이 5천년 이래 최고의 문장이라고 찬탄한 글입니다.

연암의 글은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는데, 창애는 어떤 글을 남겼던가? 창애는 1783년 51세 때 글을 모아 <自著(자저)>라는 책을 엮었고, 4년 뒤 작품을 추가했습니다. 창애 외에 著菴(저암)이라는 또 다른 호는 이 저서 덕분에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1788년 아들 만주가 죽자 “이것은 하늘이 빼앗은 것이다. 아아, 누구를 위해 지을 것이며, 누구에게 그것을 듣게 할 것인가? 다시는 문장 하는 일에 애를 쓰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向後百年無此作(향후백년무차작), 當世文章第一人(당세문장제일인)이라는 극찬을 받았던 창애의 글을 망라한 <著菴集(저암집)>에는 시도 있고 소설도 있고, 제문 전기 榜狀(방장:주민들에 대한 명령과 조정에 올린 공문서)등 다양한 글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文訣(문결)’입니다. 요즘 말로 작문론이라 할 만한 이 글에서 창애는 소재 선택에서부터 9단계의 문장대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제 설정과 창작의 기초에 관한 부분인 四綱(사강)과 五基(오기)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문장이 담아내야 할 존재의 범위는 理道事物(이도사물), 즉 하늘이 내려준 바와 사람이 말미암는 바, 효제 충신에 관한 것, 곤충과 초목에 관한 것 네 가지이며, 문장에는 천만 갈래의 길이 있지만 총괄하면 이 네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五基는 朴辨精專守(박변정전수)입니다. 학문이 넓지 못하면 시비에 밝지 못하게 되고 시비에 밝지 못하면 지식이 정밀해질 수 없으며 지식이 정밀하지 못하면 지식을 위해 전일할 수 없고 지식을 위해 전일하지 못하면 지식을 지킬 수 없다, 이 다섯 가지가 제대로 돼야만 땅을 고르게 해 토대를 닦듯이 창작의 기초가 마련된다는 뜻입니다.

창애는 이어 四質(사질) 六用(육용) 三調(삼조) 六忌(육기) 등으로, 중점 정리하듯 개념을 만들어 문장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문장은 “누에고치가 실을 뽑듯이”, “꽃잎과 꽃받침이 서로 물고 있듯이” 자연스럽고 유기적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문예창작에서 피해야 할 여섯 가지 금기로는 통일성이 없는 것, 속된 것, 진부한 것, 흐르는 것, 거친 것, 죽은 것을 들었습니다. 이 중 흐르는 것이란 물이 흐르듯 아래로 떨어져 올라가지 못하는 것, 즉 유행에 따라 특정 방향으로 전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에도 통용될 만한 창애의 창작론은 그 시대의 다른 문인들처럼 원론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누군가를 가르치듯 창작의 모든 단계를 체계적으로 다룬 강의노트와 같습니다. 실제로 창애는 아들과 후학들을 위한 교재를 만들듯이 ‘문결’을 썼습니다.

창애는 일찍이 아들 만주에게 “문장을 확 트이게 하고 기력을 주인으로 삼는 것은 내가 너보다 낫고, 汎朴(범박)한 데에 푹 젖어 생각을 글로 표현함에 궁핍하지 않은 것은 네가 나보다 낫다”고 평한 바 있습니다. 창애는 문장 자체와 문장의 氣를 중시했습니다. 德 言 功, 이른바 문장의 三不朽(삼불후:세 가지 영원불변의 가치)에 대해 학덕→공적→문장 순으로 생각하는 道本文末(도본문말)의 견해에 맞서 文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道文分離論(도문분리론)을 견지하며 이 주장을 끝내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늙도록 작문에 골몰했으나 40년이 되도록 신실한 소득이 없다”고 술회하며 후회하면서도 “미칠 수 없다 해도 道文兩端說(도문양단설)은 죽을 때까지 사양하지 않겠노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창애의 스승 南有容(남유용ㆍ1698~1773)의 아들 南公轍(남공철ㆍ1760~1840)은 창애의 사후 <저암집>에 쓴 서문에 “공은 아마도 文을 통해 道로 나아간 분이라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장이 도학의 간섭을 받거나 도학의 기준으로 평가돼서는 안 된다는 게 창애의 생각이었고, 그래서 친구 朴胤源(박윤원ㆍ1734~1799)과는 道와 文으로, 연암과는 文 자체로 다투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창애는 發憤著書(발분저서)를 하지 않았습니다. 발분저서란 고난과 역경에 처한 인간이 좌절하지 않고 이를 창작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탁월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문예창작론인데, 대표적 모델이 <史記(사기)>를 쓴 司馬遷(사마천ㆍBC 145~BC 86)과 <漢書(한서)>를 남긴 班固(반고ㆍ32~92)입니다.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크게 현달하지 못했고, 손자와 아들의 죽음을 겪은 창애가 발분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본 남유용은 “옛날 뜻을 가진 이들은 현달하지 못하면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뜻을 얻었네. 후세에 드리울 저서를 힘쓰는 것이지. 자네는 이미 곤궁한데…(하략)”라며 발분저서를 권했습니다.

이에 대해 창애는 자신이 소문에 잘 따르며 지식도 얕은데 어찌 망령되게 시비와 선악을 논해 신명의 꺼리는 바를 범하겠느냐, (그랬다가는 사마천과 반고처럼) 하늘과 사람의 재앙을 답습할 것이라는 이유로 著書自娛(저서자오), 즉 글을 쓰고 스스로 즐기는 데 머물렀습니다. 스승을 거역했다기보다 발분저서설의 작위적 저술행위에 반대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쨌든 아쉬운 일입니다. 삶과 글이 한창 원숙해지는 나이에 창애는 오히려 글 쓰기를 접었습니다. 이미 남긴 글에도 후세에 드리울 만한 經世(경세)의 논설은 없습니다.

창애는 박윤원과의 道文논쟁과 박지원과의 擬古文(의고문) 논쟁을 겪으면서 문학관에 대해 부단한 반성과 수정을 강요 당하는 강박관념을 갖게 돼 문학의 참뜻을 규명하는 본질적 문제에 집착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연암과 비교할 때 창애가 문장가의 입장에서 문장론을 전개했다면 연암은 북학의 영향 하에서 문장론의 현재성을 강조했습니다. 미학적 측면에서 창애가 문장의 순수문예적 가치를 찾고자 했다면 연암은 현실생활 속에서 문장의 존재이유를 발견하려고 한 것이 양자의 차이(유동재)라는 것입니다.

거칠게 구분하면 연암이 창작가인 데 비해 창애는 문학교사였습니다. 창애의 글 중 무엇이 백미이며, 오늘날에도 통하는 문장이 무엇인지를 대기는 어렵습니다. 창애에게 있고 연암에게 없는 게 무엇인가를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반대로 연암에게 있고 창애에게는 없거나 적은 것은 친구, 술, 우스갯소리, 매력적인 아포리즘 이런 것들입니다.

학계에서 연암그룹이라는 말을 붙였을 만큼 연암의 주위에는 늘 사람과 술이 있었습니다. “벗은 제2의 나”라는 말도 했던 연암은 白塔淸緣(백탑청연)을 주도했습니다. 지금 탑골공원의 백탑(원각사지 10층 석탑) 인근에 모여 살던 연암과 李德懋(이덕무ㆍ1741~1793) 李書九(이서구ㆍ1754~1825) 徐常修(서상수ㆍ1735~1793) 柳得恭(유득공ㆍ1749~1807) 등 이름도 쟁쟁한 사람들이 긴 기간은 아니지만 수시로 모여서 술 마시고 시와 음률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더 두드러진 차이는 유머감각과 빛나는 아포리즘입니다. 연암은 <열하일기>의 ‘渡江錄(도강록)’에서 아득하고 渺漠(묘막)한 요동벌판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시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아 다니게 마련임을 알았다.” 그리고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라는 고금에 빛나는 멋진 말을 합니다. 이 말 뒤에 인간이 꼭 슬퍼서만 우는 게 아니라는 긴 울음론이 이어지는데, 연암의 감각과 멋은 지금 사람도 흉내내기 어렵습니다.

창애에게 유머감각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며 그에게도 친구가 있었지만, 그 무늬와 결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지했던 ‘고독한 솔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마디로 창애와 연암은 체질과 파동이 다른 인물로 보입니다. 연암이 純陽(순양)의 기질을 타고난 太陽人(태양인)이라면 창애는 少陰人(소음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창애와 연암은 원래 친했던 사이입니다. 창애의 스승 남유용은 연암의 장인 李輔天(이보천)과 이종간이며, 그의 아들 남공철과는 둘이 다 친했습니다. 창애의 재종숙 兪彦鎬(유언호)는 연암을 늘 보살펴준 지기였고, 창애의 생질 金履中(김이중)은 연암과 소시적부터의 친구였습니다. 얽히고 설킨 인연으로 1772년 이전까지는 가깝게 지냈던 두 사람이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연암 박지원(1737~1805)과 다산(茶山) 丁若鏞(정약용ㆍ1762~1836)은 동시대의 인물이며 서로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만난 일이 없습니다. 서로에 대해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고, 다산의 만년작 <經世遺表(경세유표)>에 <열하일기>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 나올 뿐이라고 합니다(고미숙). 창애와 연암도 그들처럼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오히려 나았을 것입니다.

다산과 秋史(추사) 金正喜(김정희ㆍ1786~1856)도 만난 적은 없습니다. 연암과 다산은 25세, 다산과 추사는 24세 차이가 나는데 서로 만나지 못할 나이가 아닙니다. 괴테와 쉴러는 10세, 이황과 기대승은 26세의 나이차에도 교류하고 토론하며 忘年(망년)의 우정을 쌓아간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입니다.

어쨌든 창애와 연암의 집안은 원수가 됐습니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아버지가 중년 이래 비방을 받은 것은 모두 이 사람(창애)이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창애는 <열하일기>를 虜號之稿(노호지고: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라고 비방하는 데 앞장섰다는 악평이 남았습니다.

杞溪兪氏(기계유씨)와 潘南朴氏(반남박씨) 집안은 1871년에야 극적 화해를 하게 됩니다. 홍문관 대제학이었던 연암의 손자 朴珪壽(박규수ㆍ1807~1877)가 향시(鄕試:지방 과거시험)에서 장원한 15세 소년 兪吉濬(유길준ㆍ1856~1914)을 집으로 불렀습니다. 유길준은 창애의 5대손(현손)입니다. ‘실학과 개화사상의 가교’, ‘개화사상의 원류’ 박규수는 소년이 國器(국기:나라를 위해 일할 그릇)임을 알아보고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다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어른들이 풀지 못하셨던 감정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는 게 아니겠느냐”며 격려했고, 유길준은 박규수를 통해 개화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아름답고 흐뭇한 결말입니다.

창애와 연암의 관계를 살피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과 후세의 평가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을 원문보다 더 멋지게 만든 <페이터의 산문>(이양하)에는 “네가 장차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칭찬에 그렇게도 마음을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그것은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같겠습니까? 후세 사람들은 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든 이름을 남기게 되며 그 이름에 끼고 쌓인 역사의 이끼와 더께는 걷어내기 어렵습니다. 지금 가까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역사에 이름이 남고 어떤 사람은 잊혀집니다. 동시대의 인간에 대해 동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무지하고 몽매할 수도 있습니다.

遺芳百歲 遺臭萬年(유방백세 유취만년)이라고 합니다. 꽃다운 향기는 백대를 가지만 더러운 악취는 만년동안 남는다니 역사에 좋은 이름을 남기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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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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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철 (220.XXX.XXX.215)
이렇게 기록을 뒤져 정리해 주신 일만으로도 감동이 전해 오는데, 글의 내용도 매력이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에게 새로운 시도를 해 보고 싶다는 의욕도 돋구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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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10: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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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바다 (211.XXX.XXX.129)
蒼涯에 대한 그동안 몰랐던 역사 인물에 대해 다시 알게 됐습니다. 제주에서 벽랑 채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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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17:5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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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담 (211.XXX.XXX.68)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난 기분입니다. 참으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연암-창애, 박지원-유한준,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은 이들의 대결. 후손들의 화해가 더욱 멋져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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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0 1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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