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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이(遷移)와 극상(極相)
임철순 2008년 07월 07일 (월) 00:46:41
한 달에 한 두번은 꼭 산에 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겠지만 가입한 단체마다 등산모임이 있게 마련이어서 산에 갈 기회는 많습니다. 어느 단체든 소모임 중 가장 활발한 것은 역시 등산 모임입니다.

실업자가 많아지고 건강욕구가 높아지면서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등산은 건강에 좋고 돈 덜 들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어 즐겁습니다. 우리나라 등산인구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하도 많다 보니 정부 부처에 등산부(명칭이야 뭐가 됐든)와 같은 조직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최근 고교 동창들과 도봉산에 다녀왔습니다. 송추계곡에 차를 대고 사패능선 포대능선 만장봉 자운봉 주봉 칼바위를 거쳐 송추폭포로 하산했는데, 산행대장의 설명에 따르면 자주 다니기에는 약간 번거롭지만 능선 한 편으로 의정부 도봉동 수락산 불암산, 또 한 편으로는 송추 장흥이 한 눈에 들어오며 가슴이 시원함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입니다. 거기를 갔다오고도 이렇게 남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만날 다녀야 어디가 어딘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성문인지 대남문인지, 비봉인지 보현봉인지 갈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봅니다. 어디로 해서 어디로 내려왔느냐고 누가 물으면 잘 대답하지 못합니다.

어느 단체를 따라가 봐도 나는 항상 꼴찌입니다. “자, 여러분, 내가 뒤를 봐 줄 테니 배후는 걱정 말고 올라가세요”라고 헛소리를 하며 헐떡거리다 보면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늘 그렇게 뒤처져서 일정을 더디게 만드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입니다. 남들보다 땀도 훨씬 더 많이 흘립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 자체보다 정상에 올라 시원한 막걸리 한 잔 쭉 들이켜는 것입니다. 신문지로 막걸리 병을 싸서 배낭에 넣고 가면 보냉이 아주 잘 됩니다. “이거 봐, 신문은 이렇게 고맙고 쓸모가 많은 거야”하고 나는 말합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한 잔 하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나는 올라가며 내려오며 헛소리 많이 하고 술 마시는 게 좋아서 산에 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 날도 산에서 내려올 때 헛소리 한 방 했습니다. 길을 내 주기 위해 비켜 서서 기다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헐떡거리며 마지막 깔딱고개를 올라왔습니다. 나는 장난기가 생겨 “올라오는 사람들은 말이 없어”그랬는데,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와 웃었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계단을 겨우 다 올라와 내 말을 듣고는 “하이고, 숨가빠 죽겠는데 어떻게 말을 혀?”하더니 웃긴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하하하하 그러고 지나갔습니다.

올라갈 때는 예외 없이 맨 뒤에서 걸으며 군데군데 세워 놓은 안내판을 읽었습니다. 이 산에 어떤 동식물이 있는가, 나뭇잎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생강나무와 산수유의 같은 점 다른 점 등등 안내판마다 재미있고 성의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2년 전 수락산에 갔을 때는 안내판마다 안 틀린 게 거의 없을 만큼 문장이 안 되고 맞춤법도 엉망이어서 혀를 차다 못해 화가 났었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리도 많이 틀려 놓았는지 정말 한심했습니다.

도봉산의 안내판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천이(遷移ㆍsuccession)와 극상(極相ㆍclimax)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식물생태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아는 말이지만, 나는 천이와 극상이 그렇게 서로 다른 개념인 줄 몰랐습니다. 숲은 늘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식물의 군집도 인간 사회가 형성되고 발전되어 가듯이 점차 변화합니다.

이 과정을 천이라고 하며 마지막 단계로 습도와 온도가 적당한 토양 위에서 이루어진 안정된 산림군락을 극상림이라고 합니다. 지구 상의 숲들은 모두 극상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입지에서 같은 조건이 주어지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천이가 진행되지만, 최종 단계인 극상군락에서는 방향성이 있는 변화는 볼 수 없으며 식물 동물 환경 상호 간에 생태적인 평형관계가 유지된다고 합니다.

극상, 극상이라. 참 고맙고 안심이 되는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도 천이 중인가, 이미 극상에 이르렀는가. 극상에 이르렀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건방진 짐작인지 몰라도 나를 극상의 단계로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천이 중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삶이 안개 속처럼 흐릿하고 어찌 전개될지 알 수 없었던 20대 초반만 해도 나는 ‘어느 개인 날 아침 갑자기’ 무엇인가 이루어지고 무엇엔가 홀연 눈이 뜨는, 변신과 개안의 가능성을 믿었습니다. 이제 그런 기대는 허망한 공상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천이와 발전의 가능성은 아직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천이와 극상에 관한 그 안내문을 읽은 다음부터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동안 헛소리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대체 내가 아는 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무슨 주제라도 좋으니 1시간 동안이라도 이야기할 거리가 나에게 있나. 나무 이름이든 풀과 꽃의 이름이든 아는 게 거의 없고, 등산장비에 대해서도 너무도 모릅니다. 흰 목장갑의 빨간 칠이 돼 있는 곳이 손바닥 부분인 것을 모르고 반대로 꼈다가 망신 당하고, 남들은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는지 궁금했습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비박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나무와 나무, 바위와 바위 사이에 해먹(hammock) 같은 걸 걸고 자는, 그래서 바람에 흔들리면서 자는 飛泊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참 무지하고 낭만적이네!). 알고 보니 비박은 텐트를 치지 않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산에서 잠을 자는 것을 말하는 독일어 Biwak(정확한 한글 표기는 비바크)인데, 이 알뜰한 독문과 출신은 그것도 모르고 남들과 이야기할 때 박박 우긴 일까지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사람이 “그래요? 내가 잘못 알았나?” 했을 정도니까.

말을 배워야겠다,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말이 너무도 많구나. 그 날 그런 생각을 골똘히 했습니다. 말년의 미당 서정주는 세계의 산 이름을 외우고 익히면서 시를 썼는데, 치매를 막기 위해 그런 것이든 아니든 나이 들어서도 계속 말을 익히고 배우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정확히 말해 읽다 만) Norman Lewis의 <Word power made easy>라는 책에는 어른이 되면 어느 날부턴가 더 이상 말을 배우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배우는 것에 대한 충동과 욕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일부러 공부를 하지 않아도 생활 자체가 말을 배우는 일인데, 어른이 되면 어느새 더 이상 어휘가 늘지 않게 됩니다. 새로 이해한 것, 새로 발견한 것이 없는 데다 그 새로운 이해와 발견을 남들에게 표시하고 전달하려는 의사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죽을 때까지 어린이처럼 배우려는 욕구를 잃지 말아야 하며, 그런 욕구를 되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날 산에서 내려오며 하루에 한 가지씩 새로운 말을 익히기로 했습니다. 사나이 한 평생은 무거운 짐 지고 먼 길을 가는 것. <논어>의 말씀대로 任重道遠(임중도원)이라, 짊어진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도 하구나. 배움의 길은 그렇게 끝이 없나니. 죽을 때까지 말을 배워야 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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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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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룡 (211.XXX.XXX.129)
좋은글 저도 많이 반성하고 앞으로 국어 공부 많이하여 치매예방하도록 하겠습니다.

늘 좋은글 보내 주셔서 후배님게 감사드립니다. 조 현 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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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8 08: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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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길 (220.XXX.XXX.188)
임 주필님, 식물도감을 들고 나무, 풀과 꽃 이름 확인하며 수락산 산행하시던 모습, 참으로 존경스럽고 부러웠읍니다. 산행 중, 늘 해박한 지식으로 배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산행에서도 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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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8 02: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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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분순 (211.XXX.XXX.129)
2008년 7월 07일 [월요일] 오후 01:35
임주필님, 어쩜 그리도 구구절절 옳은 말씀만 하시는지, 감탄합니다.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못 배우고 가는 게 현실이지요. 주변을 둘러봐도 모르는 것 투성이더라구요. 무더위 잘 견디시고 건강하세요. 한 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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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7 1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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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211.XXX.XXX.129)
자유컬럼을 보면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습니다. 기다린 보람이 큽니다. 제 스스로도 무척 무식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우쳐 주셨습니다. 천이와 극상을 음미합니다. 늘 건강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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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7 15: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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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기 (211.XXX.XXX.129)
2008-07-07 10:37:43
항상 좋은 글을 읽으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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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7 15: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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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근 (211.XXX.XXX.129)
2008년 7월 7일 [월요일] 오전 10:33
천이와 극상,,,,우리삶에도 필요한말아닌지요,,
그리고 자유칼럼그룹은 순수친목단체인가요?? 아니면 같은 이념을 공유하시는분들의 단체인가요? 궁금하군요??? 늘 좋은글감사 합니다,,,,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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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7 14: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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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순 (211.XXX.XXX.129)
2008년 7월 07일 [월요일] 오전 09:44
임 국장님, 채길순입니다.방학이라 한국에 나와 있는데, "좋은 말씀(글)" 감사합니다. 물론 북경에서도 빠짐없이 국장님의 글을 대하고 있습니다.정말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아랫자리에 내려오게 되는군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그리고, 더 좋은 글 기대합니다.채길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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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7 14: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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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회 (211.XXX.XXX.129)
2008-07-07 09:36:05
임 주필님의 글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이번 글도 편안한 맘으로 읽었구요, 단어 '비박'도 정확하게 설명세 주셔서 좋습니다. 저도 소주 한잔씩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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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7 14:5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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