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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번호 2-0419
황경춘 2008년 06월 21일 (토) 00:04:24
얼마 전 신문에서 '체첸'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라 이름엔 틀림없는데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확신적인 뇌의 반응이 없었습니다. 근래에 와서 가끔 있는 일이지만 좀 당황했습니다. 이건 분명히 뉴스에 많이 나온 지명인데 내가 왜 이러지 하는 마음의 동요 말입니다.

저의 경우 나이에 따른 신체기능의 저하에 정신적으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이러한 기억력의 순발력 둔화였습니다. 노령에 경계해야 할 치매의 초기 증세가 기억력 감퇴로 나타난다는 말에 퍽 신경이 쓰이기도 한 현상이었습니다.

찰리 채플린이나 윈스턴 처칠처럼 초인적으로 노경에 예술가나 정치가로서 괄목할 활약을 한 선인(先人)도 있지만, 우리네 범인은 나이 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지고 사고의 순발력이 둔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금년 가을에 치러지는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의 가장 큰 핸디캡의 하나가 나이입니다. 1936년생이니 올해 72세인데, 1961년생인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보다 25세나 많습니다. 특히 현직 대통령의 재선이 허용되는 미국에서는 후보의 건강과 연령이 항상 선거에서 큰 관심사가 되어왔습니다.

1960년, 우리나라에서 이승만 박사가 85세의 고령으로 네 번째 대통령 임기에 도전하고 국민이 이를 받아들인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큰 모험이고 정치적인 도박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찔한 일입니다.

냉장고 속에 휴대폰을 넣어두고 온 집안을 찾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는 노인이 있는 가정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노인을 더욱 실망케 하는 것은 갑자기 친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평소에 기억하고 있던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등의 순간적 기억상실일 겁니다.

사람의 기억력을 다스리는 뇌 기능은 컴퓨터의 디스켓처럼 저장용량에 한도가 있어 옛날 기억은 새로운 것에 밀려 퇴출된다고 흔히들 말합니다만, 반드시 그런 것만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근 것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과거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믿었는데, 이상하게도 50대 전후 한 시기의 기억이 유달리 희미하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말의 사무실 전화번호는 뚜렷이 기억하면서, 오히려 1970년 경의 사무실 전화번호는 기억하지 못하는, 말하자면 전후 순서가 뒤바뀌는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을 돕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연관법(association)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기억할 대상과 연관이 있는 것, 힌트를 줄 수 있는 것을 함께 기억하는 방법 말입니다.

제가 1950년대 말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뭐 별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그 번호가 공교롭게도 2-0419 였던 것입니다. 다들 신기하게 여기고 심지어 어떤 여자 분은 4ㆍ19 학생혁명 후에 일부러 전화를 걸어 “너무 좋은 번호라서 그저 걸어 봤어요”라고 한 일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특히 국번까지를 합쳐 “제2 공화국 419라는 뜻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여튼 우리 사무실의 전화번호는 그렇게 유명했습니다. 이때 같이 쓰고 있던 2-4620 번호도 제가 지금까지 외우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0419 전화번호와의 연관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전화가 있던 사무실은 얼마 후 다른 건물로 옮기는 바람에 새 번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관할 전화국이 달라 전화번호를 그대로 가져가지 못한 게 원통했습니다. 이 새 사무실을 사용한 햇수는 전 사무실보다 길었는데도 지금 그때 전화번호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전 사무실에서 사용하던 미군 전용전화는 번호가 ‘Yongsan 3091’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이 번호까지 기억하는 것은 아마 4ㆍ19 혁명과의 연관성 때문이 아닌가 혼자서 추측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체첸'의 경우처럼 좀 생각하고 나면 아 그거 하고 금방 머리에 떠오르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처럼 자신을 무척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기억의 순발력 둔화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회화 도중에 “거시기”를 연발한다든가 한 아이 이름을 부르려면 다섯 아이 이름을 차례로 다 불러대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생깁니다.

작년에 미수를 맞이한 대학선배 한 분은 자기는 30여 년 동안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봉직했는데 정년퇴직 후 20여 년을 영어책을 멀리해 살다 보니 이젠 쉬운 단어를 빼고는 영어가 아주 생소한 언어가 되어 버렸다는 거짓말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도 가끔 쉬운 단어의 철자도 자신이 없어 사전의 힘을 빌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희롱(sexual harassment)의 뒷 단어에 'r'이 하나인지 둘인지 가물가물할 때가 있습니다. 비슷한 철자인 embarrassment (당황)와의 혼돈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6ㆍ25 때 임시수도 부산 거리에서는 탈영자나 병역 기피자 색출을 위한 군경 합동 불심검문이 수시로 있었습니다. 당시엔 아직 단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검문에 답할 저의 생년은 1924가 아닌 4257이었습니다. 이 숫자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외운 결과라 할까요.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 랜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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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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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탁 (211.XXX.XXX.129)
동감! 동감!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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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9 14:27:48
0 0
오마리 (24.XXX.XXX.49)
저역시 10년 가까이 집안에 있어 캐나다에 거주하지만 영어를 하루 몇분 쓰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단어를 다 잊어버리고 스팰링이 아물아물하여 사전으로 확인합니다.
이번 다시 사회 활동 재개하는데 옛날 같은 영어가 안됩니다. 특히 입이 굳어 발음이 나빠지고 교통사고로 치아를 몇개 잃은 후로는 더 심해져 황당할 때 많습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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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8 21:18:02
0 0
임철순 (211.XXX.XXX.129)
저는 이 전화번호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중부경찰서 기자실. 27국은 나중에 267국으로 바뀌었지요. 765-3718, 이건 동대문경찰서 기자실. 요런 건 잘 기억하는데 다른 건...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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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5 18:36:23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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