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작은 놈이 올해 대학 나와 취직했는데 첫 월급이 1억5,000만 원이더라고."
"그래, 우리 아들은 직장 다닌 지 벌써 3년째인데 2억 원이야."
아주 옛날 포클랜드 전쟁(1982)이 끝난 몇 년 후 아르헨티나로 여행갔을 때 수도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한국 교민들끼리의 저녁 모임에서 들었던 대화입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1980년대 해외이민 붐이 일 때 미국에서든 남미에서든 현지 교포사회에선 자기들끼리 대화하면서 거주국의 화폐단위를 한국의 단위로 말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선 집 사글세가 한 달 600달러면 600원이라고 하고, 커피 한 잔 값이 1달러50센트면 1원50전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르헨티나 화폐단위는 페소(Peso)입니다. 이들 두 아르헨티나 교민의 아들 월급이 1억5천만 페소와 2억 페소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억대 월급을 받는  아들을 둔 아버지들의 말투는 전혀 감동이 없이 심드렁했습니다.

그때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 패배로 군부가 권력을 잃고 민간 대통령이 들어섰지만 지독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여행자들이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도 달러가 더 자연스럽게 유통되었습니다. '0'이 네댓 개 붙은 페소화로 바꿔 쓰는 게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달러값은 아침과 저녁이 확연히 다르게 올랐습니다. 억대 월급이 감동스럽지 않은 것은 바로 인플레이션으로 돈 가치가 폭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지만 아르헨티나의 고질적 인플레 경제는 여전한 모양입니다. 아르헨티나 통계청은 지난 9월 물가가 지난해 같은 달보다 138.8% 올랐다고 발표했고, 이에 따라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133% 인상했습니다. 살인적 인플레입니다. 기준금리 0.25% 인상을 놓고 바들바들 떠는 한국이나 살얼음 위를 걷듯 신중한 미국의 상식으로 보면 어떻게 이 나라가 유지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플레로 뒤죽박죽이 된 경제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적응방식은 미국 달러를 자국 화폐처럼 쓰는 것입니다. 시시각각 값이 떨어지는 페소화가 아니라 미국 달러화 기준으로 경제활동을 해왔습니다 .

미국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미국 달러화를 가장 좋아하는 국민이 아르헨티나인들입니다. 그들은 장사를 하거나 월급을 받아 소득이 생기면 달러로 환전해 두려 합니다. 달러 암거래는 시민의 일상입니다. 그들은 달러를 바꿔서 매트리스 밑이나 지붕 서까래 사이 또는 땅을 파서 보관합니다. 그게 자산 가치를 가장 안전하게 저장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통계가 있습니다. 전 세계에 유통되는 미국 달러 현금의 10%가 아르헨티나에 있다고 합니다. 그 액수가 무려 2,000억 달러입니다. 아르헨티나인의 1인당 평균 달러 현금 보유액이 4,400달러입니다. 미국인 1인 평균 보유 현금 3,100달러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런 달러 선호현상은 바로 아르헨티나인들이 큰 거래를 하면서 달러로 결제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집이나 차를 살 때 아르헨티나인들은 100달러 지폐 다발을 주고받습니다. 그렇게 넘쳐나는 달러가 중앙은행 금고에는 텅텅 비어있고 민간의 수중에 있으니 아르헨티나 정부의 통화정책은 힘을 받을 수 없습니다. 

경제난에 시달리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지난 11월 19일 대통령선거에서 전기톱을 들고 유세장을 누비면서 기존의 경제시스템을 뜯어고치겠다고 주장한 괴짜 경제학자 하비에르 밀레이 야당후보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의 스타일로 유권자에 파고든 우파 정치인입니다. 그는 20세기 아르헨티나를 풍미했던 페론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재정 인플레의 근원인 복지지출을 삭감하는 것은 물론, 중앙은행을 폐쇄하고 미국 달러화를 아르헨티나의 공식화폐로 정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특히 미국 달러 공용화 같은 극단적 정책은 세계 경제전문가들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게 아르헨티나 경제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 전문가들도 혼란스러워하는 모양입니다. 밀레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이틀  동안 달러화의 가치가 12%나 뛰었다고 하니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불안 심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달러화를 공식화폐로 삼겠다면 미국이 좋아할지 모르겠습니다. 달라화가 공식화폐가 되면  아르헨티나 경제가 사실상 미국중앙은행(FRB)의 영향 아래 들어갈 것인데, 과연  좌파 페로니즘에 젖어 살아온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가만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아르헨티나는 면적이 한국의 18배나 되는 거대한 나라입니다. 목축과 곡물재배에 적합한 팜파스 대평원이 있고 각종 지하자원과 수산자원이 풍부합니다. 특히 탈석유시대의 자원인 배터리산업의 소재인  리티움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세계 배터리기업으로부터 구애를 받고 있습니다. 4,500만 명이 되는 인구의 구성도 다인종 국가인 미국이나 브라질과 달리 유럽계 백인이 95% 이상 되어 균일적입니다.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20세기 세계 대전의 영향도 받지 않았을 만큼 지정학적 안보 문제도 별로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르헨티나는 정말 잘될 일만 남은 국가처럼 보입니다.  

20세기 전반기 한 때 농산물 수출에 힘입어 세계 5, 6위의 부국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의 80%까지 쫓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랬던 아르헨티나가 지금은 IMF 평가로 GDP순위 24위, 1인당 국민소득 순위 66위로 추락하고 눈덩이처럼 외채를 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르헨티나는 G20 정상회의(세계 20대 부국)에 초대받아 대우받고 있습니다. 과거의 영광과 남미 2대 강국으로서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밀레이 대통령이 10일 아르헨티나 대통령궁에 입성했습니다. 그가 페로니즘과 미국달러화에 빠져버린 아르헨티나 국민과 아르헨티나 경제를 구할 수 있을지, 아니면 브라질의 자이루 보소우나르 처럼 4년 후 쫓겨나는 우파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지 구경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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