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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대화하는 사람들
노경아 2023년 10월 31일 (화) 00:00:33

옷장 깊숙이 있던 오래된 시계 상자를 꺼냈어요. 얇은 옷은 넣고 두꺼운 옷을 꺼내다, 잠시 쉴 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상자를 열었어요. 그 순간 갇혀 있던 추억들이 쏟아져 나와 행복했어요. 비싼 시계는 아니지만 하나같이 젊은 날의 이야기를 담고 있거든요. 다시 상자를 덮는데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시계가 떠올랐어요. 

 
저마다 사연을 품고 있는 시계들. 입학식이나 졸업식 선물로
아날로그 손목시계가 인기 높았던 시절이 있었다
 

장염으로 죽을 뻔했다 살아난 날, 아버지가 시계를 사주셨어요. 지금이야 장염이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질병이지만 40여 년 전엔 죽어 나가는 아이들도 있었거든요. 손목시계를 채워주며 눈물 글썽이던 아버지 모습에, 이유도 모른 채 따라 울었던 기억이 생생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아이를 낳은 다음에야 그날의 아버지 마음을 알았어요. 어린 딸을 잃을까 애끊던 마음을요. 

철없던 나는 시계를 자랑하려고 다음 날 꾸르륵대는 배를 움켜잡고 학교에 갔어요. 쉬는 시간마다 변소를 들락거리면서도 오른손에 찼던 시계를 왼손에 옮겨 차며 자랑질을 해댔죠. ‘착칵착칵’ 시계 가는 소리를 들려주는 대가로 친구들에게 (치사하게) 눈깔사탕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해요. 1970년대 말 강원도 광산촌 아이들에게 손목시계는 구경하기 힘든 귀한 물건이었거든요. 텔레비전도 귀해 동네 이장님 집에 모여 ‘똑순이’가 주인공인 드라마 ‘달동네’를 보던 시절 이야기예요. 

꾸준한 사랑을 받는 카르티에 '산토스'. 카르티에가 비행기 조종사 친구를 위해 만든 모서리가 살짝 둥근 사각형모양의 손목시계. 게티이미지뱅크

“결혼 30주년 기념일에 ‘카르티에’ 손목시계를 사줄게.” 요즘 남편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에요. “시계의 명품 중 명품은 카르티에”라면서요. 카르티에는 프랑스 ‘왕실 보석상’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가 1847년에 창안한 보석·시계 브랜드예요. 모서리가 살짝 둥근 사각형 모양의 ‘산토스’가 상징적인 제품이죠. 비행기 조종사였던 친구 산토스 뒤몽을 위해 만든 손목시계예요. “조종하면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게 불편하다”는 친구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던 거죠. 1911년 일반인에게도 판매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최고의 시계로 사랑받고 있어요. 사물에 이야기가 담기면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의 사랑은 변치 않는 듯해요. 

21세기 들어서면서 세상은 빠르고 엄청나게 변했어요. 영화 ‘써니’에서 여고생들이 방바닥에 엎드려 낄낄거리며 말했던 ‘선 없는 전화기’는 5세대(G) 통신 시대를 열었고, 자동차는 운전자 없이 스스로 운행하고 있어요. 시계도 기가 막힌 변화를 꾀했죠. 시간을 보는 것에서 발전해 통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심지어 혈압 등 건강도 관리할 수 있어요. 이 놀라운 기능에 매료돼 지금은 열 명 중 세 명이 ‘스마트 워치’라는, 똑같은 모양의 시계를 차고 다니죠. 특히 20·30대 젊은 층은 절반가량이 이 시계를 사용한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어요. 

제 주변의 젊은이들은 스마트 시계를 잘 활용합니다. 근무 중 한 시간에 한 번씩 어김없이 사무실을 벗어났다가 돌아옵니다. “시간을 정해두면 시계가 운동하라고 진동해요. 화면엔 걸어야 한다고 발자국도 표시되고요.” 기사에 몰두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나는 기계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젊은이들이 그다지 ‘스마트’해 보이진 않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꼰대가 확실합니다. 나이가 더 들면 시계(남편이 약속을 지킨다면 ‘카르티에’)와 이야기를 할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시인 김남조처럼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시계와 생각을 주고받았던 그의 시 ‘시계’를 읽습니다. 

“그대의 나이 구십이라고/시계가 말한다/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내가 대답한다/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그러나 잠시 후/나의 대답을 수정한다/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시계는/즐겁게 한판을 웃었다//그럴 테지 그럴 테지/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그쯤이 정답일 테지…/시계는 쉬지 않고/저만치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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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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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용 (220.XXX.XXX.57)
저의 시계는 ROLEX -
1991년 전남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Europe 5개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해외연수시 스위스에서 고가(금액은 생각않남)로 직접구입했는데
지금도 보증서를 소지하고 있습니다. 근데, 울 손주들이 할아버지 죽으면
서로 갖겠다고 야단이네요요요 -시계는 역시 스위스 아닌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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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31 16:24:57
1 0
노경아 (116.XXX.XXX.129)
시계는 스위스 맞습니다! 롤렉스를 꿈꾸는 이들이 정말 많던데요. 건강하실 때 롤렉스 건네주실 손주를 정하셔야겠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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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1 15:37:21
1 0
정병용 (220.XXX.XXX.57)
알겠습니다.ㅎㅎ
답변달기
2023-11-02 09:02:05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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