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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사(社) 최후의 걸작 파커 75
박종진 2023년 10월 19일 (목) 00:00:19

스마트폰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에 시내에서 친구를 만나려면 종각역 10번 출구 앞에 있었던,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그 건물은 6층까지 있었는데, 저는 늘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가 3층에 있었다가 나중엔 4층으로 옮겨간 문구 판매대를 둘러보았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저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으로 단숨에 뛰어 올라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거기엔 반짝반짝 빛나던, 너무 비싸 가져볼 생각도 못 했던 새것 파커 75가 있었습니다. 새것은 종로서적에만 있었습니다. 명동이나 남대문에서도 파커 75를 볼 수 있었지만 정말 깨끗한 새것은 보기 어려웠습니다.

 
(왼쪽) 다양한 파커75 / (오른쪽) 파커75 특유의 격자무늬  

제가 처음 산 파커 75도 중고였습니다. 용돈을 아끼고 아껴 남대문에서 샀는데, 크로스해치(crosshatch), 가로와 세로로 촘촘하게 격자무늬를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뚜껑을 열고 쓰려면 바로 써지지 않았고, 흔들어 주어야만 글씨가 써졌는데, 쓰다가 잠깐 두면 펜 끝이 말라 글씨가 써지지 않았습니다. 그땐 잘 몰랐습니다. 펜촉과 겉이 멀쩡하면 잘 써지는 줄 알았고 잉크가 나오는 길인 피드(feed)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만년필이 잘 나오려면 펜촉도 중요하지만, 피드가 좋아야 하는데 말이죠. 

실용적인 만년필의 시작도 펜촉을 잘 만들어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워터맨이 실용적인 만년필의 아버지가 된 것은, 액체가 좁은 틈으로 잘 흐르는 현상인 모세관현상을 이용하여 잉크를 펜 끝으로 잘 보내는 피드를 만든 덕분이었습니다. 참고로, 현대 만년필은 워터맨이 만든 이 피드를 근간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만년필에 끼우는 금 펜촉은 워터맨 피드보다 약 50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피드가 이렇게 중요한데, 그땐 저도 몰랐고 남대문의 만년필을 팔던 상인들도 몰랐습니다. 잉크가 잘 나오지 않으면 펜촉에 보이는 틈에 칼을 넣곤 했습니다. 만년필이 잘 나오지 않을 때 칼을 넣으면, 잉크가 흐르는 틈이 넓어져 모세관현상이 깨져 펜촉은 고장납니다. 특히 파커 75는 파커사(社)가 당시 갖고 있던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여, 만든 것으로 매우 정교했기 때문에 이해가 부족한 일반인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름이 75인 것은 회사의 창립 75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당시 회장이었던 케네스 파커는 자사(自社)가 만든 파커 조터 볼펜이 엄청나게 잘 팔리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선천적으로 볼펜을 싫어했고 만년필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정말 좋은 만년필을 만들어 볼펜이 득세하는 세상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파커 조터 볼펜이 나온 1954년부터 약 9년 동안의 연구 끝에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간에 파커61과 45 그리고 VP가 있기 때문에 파커 75를 9년간 연구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9년 전부터 정말 좋은 만년필을 만들려고 노력하다가 그 끝에 파커 75가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싶습니다. 

가장 중점으로 적용된 기술은 만년필을 잡을 때 꼭 정석(定石)으로 잡지 않아도 펜촉과 그립을 자기한테 맞게 조정할 수 있는 정밀한 장치를 장착했고, 먼저 나왔던 파커 45에 적용한 새로운 잉크 넣는 방식인 ‘카트리지 및 컨버터’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만년필 몸통에 새겨진 아름다운 격자무늬는 케네스 파커가 자기 갖고 있던 담뱃갑을 디자이너에게 보여줘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실제 광고에도 19세기 런던의 은세공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이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파커 75는 1964년(어떤 자료에는 1963년)에 상업적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초기 생산품의 경우 792번 검사를 하고 합격해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1981년까지 1,100만 자루가 팔렸고 1994년까지 약 30년간 생산되었습니다. 몸체 전체가 금속인 만년필인 올 메탈(all metal) 시대를 열었고 세상 모든 만년필이 이 유행을 따라 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 만년필의 부활 시기에 시작된 유행에 밀려 1994년에 단종(斷種) 되었지만, 파커 75는 아까운 만년필입니다.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쉬운 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공을 생각하지 않고 진심으로 물건을 잘 만드는 것. 그럼 성공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파커 75처럼 오래전에 나온 만년필을 좋아하는 사람의 한물간 생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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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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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진 (164.XXX.XXX.146)
파커는 맥아더의 숨결이 0.01%정도는 깃든? 듀오플드 빅레드에 너무 만족을 해서 현행 조터를 써 봤는데... 연구소장님의 옛 경험과 비슷했습니다. 마르고 잘 안나오고 흔들어야 하고... 복각 51이 나왔을 때 이런 경험으로 쉬이 손이 가지 않더군요. 파커의 황금기에 장인정신으로 만들어진 이 녀석이 매우 궁금해 집니다. 언젠가는 써 볼 날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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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5 10: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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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에디) (180.XXX.XXX.59)
이베이를 통해 2자루의 75를 구했습니다.
초기 모델인 줄 알았는데 여러 파츠를 짬뽕한 펜들이더라구요. 약간의 실망은 있지만 그럼에도. 그냥 그 형태와 빈티지를 인정하고 쓰게 됩니다. 대형기를 쓰다보니 약간 작은 듯하지만 정말 말씀대로 뺄 것이 없는 짱짱한 펜입니다. "딱"이라는 느낌?
좋은 펜 소개해주셔서 마음 줄 수 있는 동반자가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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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5 00: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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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 (210.XXX.XXX.39)
파커 75 이베이에서 겨우 구했습니다 1월에 온다는데 기대됩니다 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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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30 15: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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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영 (106.XXX.XXX.86)
75에 담긴 서사와 스토리를 정말 재미있게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글 말미에 담아주신 교훈은 더 와 닿고요. "진심으로 물건을 잘 만들어야 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메이커와 브랜드가 되새기고 따라야 할 미덕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같이 모든 게 빠르고 쉽게 유통되는 세상에 살다 보니, 저도 본질과 정도를 잠시 망각했던 듯 싶습니다. 소장님 글 읽고 심기일전하게 됩니다!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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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3 13: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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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18.XXX.XXX.25)
여기서도 뵙네요. 참 답은 쉬운데 말이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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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07: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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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훈 (1.XXX.XXX.196)
지난번 칼럼(9.11, "진짜와 가짜")에 댓글을 올렸던 독자 입니다.
늘 좋은 지식 정보와 지혜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선친 회갑(1982년)때 만년필을 선물로 드렸다가, 십년후 작고하신 다음, 유품 정리하다가 발견한 그 만년필이 바로 격자 무늬 <파커75> 입니다. 선친께서 사용하지 않고 소중히 보존하신 그 <파커75>를 저는 지금도 잘 간수하고 있고 때때로 은빛 표면을 윤이나게 닦아서 감상합니다만, 여전히 기능미약의 이 만년필은 저에게는 참 수수께끼입니다. 선친도 저도 평생 공직에 봉직하면서 수많은 만년필을 애용했습니다만, 몽블랑도 파커45도 이처럼 기능미약인 경우는 없었습니다.
한때는 파커 본사를 걸어 소송을 하고 싶을 정도였지요.
지금은 가끔 꺼내어 아름다운 외형만 조용히 감상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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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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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23.XXX.XXX.187)
그 만년필 저도 보고 싶습니다. 어떻하면 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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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23:5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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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XXX.XXX.196)
저도 만나 뵙고 싶습니다.
박소장님 사무실을 제가 방문해서 뵐 수도 있겠고, 아니면 박소장님 인터넷주소를 주시면, 서로 연락해서 약속해도 좋겠습니다만, 다른 아이디어 있으시면 제안해 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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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21: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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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현 (211.XXX.XXX.73)
파카75 만년필이야말로 어찌보면 만년필 진화의 진정한 정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파카75로 만년필 전체 역사를 꿰뚫어 보게 해 주시는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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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18: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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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23.XXX.XXX.187)
파커75는 다시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도 충분한 만년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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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0 00: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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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펠리칸 (175.XXX.XXX.32)
어린시절 45를 쓰면서 동경한 75만년필을 40이 넘어서야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 느낌은 따뜻한 느낌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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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14: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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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23.XXX.XXX.187)
다들 45로 다음 보이는 만년필이 51이나 75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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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0 00: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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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선 (39.XXX.XXX.106)
그동안 출시된 만년필은 많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회자되고 사람들이 찾게되는 펜은 정말 일부죠.
계속 회자되고 찾게되는 펜 중 하나인 파카75에 대한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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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1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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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23.XXX.XXX.187)
그러게요. 알고 보면 몇 개 없죠. 하지만 그 몇 개가 그 안에서 수십, 수백이 된다는 것이 어려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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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0 00: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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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172.XXX.XXX.44)
볼펜의 시대에 만년필로 성공한다는 게 참 대단한 성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목표를 높게 세우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말이겠지요? 회사는 이윤을 내기 위해 세운다지만 이정도의 열정은 문구의 역사를 바꾸기도 하는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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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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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23.XXX.XXX.187)
盡人事待天命 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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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0 0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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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 (220.XXX.XXX.162)
에전에 썼던 펜을 글로 보니 더 반갑습니다
항상 좋은 글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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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10: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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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추억에 있는 만년필이 나오면 반갑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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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10: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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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석 (122.XXX.XXX.173)
글이 올라올 때가 되었는데...하며 몇일을 들락였습니다.

내가 찾는 한자루의 만년필에 다가가는 여정이 즐겁니다.

오래 계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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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10: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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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어이쿠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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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10: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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