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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RBG’와 미국의 여권(女權)
허찬국 2023년 10월 18일 (수) 00:00:05

지난주 202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클라우디아 골딘(77, Claudia Goldin) 하버드 대 교수는 각종 데이터를 발굴·분석하여 과거와 현재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와 성과를 연구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20세기 중반 이후 큰 변화가 있었는데 1970년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보다 약 40% 낮았던 것에 비해 1980년대 이후에는 그 차이가 크게 줄어 30%~20%대로 낮아졌죠. 지금의 미국은 여성의 지위가 크게 향상된 것에 비해 50~60년 전 사회의 인식과 관행은 크게 달랐습니다. 그사이 약진 뒤에는 여성의 지위 개선에 장애가 되는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2020년 87세로 타계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RBG) 대법관입니다. ‘악명 높은 RBG (Notorious RBG)“는 2015년 출판된 전기(傳記) 제목입니다. 

   
  (왼쪽) 긴즈버그는 법복 위에 레이스 장식을 즐겨 입었다.
(오른쪽) 어린 여자 아이들의 긴즈버그 따라하기 모습을 할로윈 때나 SNS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긴즈버그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엄격하고’ 좀 ‘고리타분’한 분야에 평생을 바친 법조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기하게도 지난 10년 가까이 RBG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단적인 예가 그녀의 여권신장을 위해 기울인 노력을 다룬 다큐멘터리 “RBG”가, K-pop 미국 진출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MTV의 2019년 ‘영화와 TV상’을 수상한 일입니다. 어린이와 젊은 여자들 사이에 그녀의 위상은 아이돌 가수 못지않습니다. 신장이 150cm 정도인 작은 몸매뿐만 아니라 수줍은 성격, 상당히 원만한 대인관계 등을 감안하면 RBG의 악명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생 양성평등을 위해 쏟은 노력과 열정은 어떤 독한 서부영화 악당을 능가했기에 회자되는 애칭(愛稱)인거지요. 대학 시절 만난 남편 역시 성공적인 변호사였는데 자신의 경력을 희생해가며 긴즈버그 외조에 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출생한 긴즈버그의 부모는 의류가게를 운영하는 동유럽 출신 유태계 이민자였습니다. 향학열이 높았으나 사정이 어려웠던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오빠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고등학교를 마친 긴즈버그의 모친은 대학 진학 대신 의류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장년층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우리나라 과거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죠.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이 자신을 대법관 지명하는 기자회견에서 RBG가 “나는 제 어머니가 여성들이 소망하는 바를 이룰 수 있고, 딸들이 아들과 마찬가지로 소중히 여겨지는 시대에 살았더라면 이루었을 업적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라고 소감을 밝히자 클린턴 대통령이 눈물을 보였다 합니다.

저명한 언론인이자 법률가인 그린하우스(Linda Greenhouse)의 2020년 추모 기사는 긴즈버그가 젊은 시절 겪었던 여성차별과 같은 개인사, 공적 활동, 그리고 여성 권리증진에 대한 기여를 자세히 소개합니다(“Ruth Bader Ginsburg, Supreme Court’s Feminist Icon, Is Dead at 87,” 2020.9.18., 뉴욕타임스). RBG는 대법관이 되기 전 워싱턴DC연방항소법원의 판사로 재직했고, 그 이전에는 콜럼비아 법대 교수 및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의 여권(女權)프로젝트의 디렉터로 활동했습니다. 이때가 1970년대였지요. 1973년부터 1978년까지 6건의 연방 대법원 송사에 참여하여 변론을 했는데 그중 5개에서 승소합니다. 

ACLU는 파급력이 큰 소송에 참가하여 주도적으로 법정에서 의견을 개진하는데 긴즈버그는 신중하고 치밀하게 참여할 사건을 선정했습니다. 성별에 따라 차별하는 법이 적용되는 사건 중 남자가 차별당하는 경우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반세기 전 미국은 양성평등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수정헌법 14조가 보장하는 평등보호(Equal protection)가 인종에는 적용되나 남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런 여건에서 대법관들에게 성별을 기준으로 차별하는 것도 평등보호에 위배되며 비합리적임을 일깨우는 전략을 따른 것이지요.

ACLU 시절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당시의 사회보장 관련법(1935년 제정된 사회보장법)은 남편이 사망하면 생존한 부인이 어린 아이 양육을 위해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지만 반대 경우에 대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남자가 가구의 주된 소득원(所得源)이라는 가정 하에 당연시하던 일인 듯합니다. 그런데 비정규 자영업자인 남편보다 더 소득이 많았던 고등학교 교사인 부인이 출산 후 사망하자 남편이 집에 머물며 아이를 양육하겠다고 생존자 혜택을 신청했습니다. 혜택을 거부한 정부와 남편 사이 시작된 법적 분쟁은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옵니다. 대법관들은 성별에 근거를 둔 차별이 부당하다는 긴즈버그의 주장에 동의하여 원고인 남편의 손을 들어줍니다(Weinberger v. Wiesenfeld, 1975). 남성이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를 통해 성차별의 비합리성을 직시하도록 하는 사례입니다. 

RBG는 이 사건이 종결된 후에도 이 부자(父子)와 계속 연락을 유지하였습니다. 1998년에는 플로리다주에 가서 성인이 된 아이의 결혼식에 주례를 섰고, 아이 어머니 사망 42년 후인 2014년에는 그녀의 주례로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식을 대법원에서 거행했다고 합니다. 

대법관으로 참여한 판결 중 버지니아주가 세운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 VMI)가 여성의 입학을 금지한다는 이유로 연방정부가 버지니아주를 제소한 사건이 회자됩니다. 버지니아주는 VMI과정이 힘들어 여성을 입학시키지 않는 것이라 했지만, 1996년 긴즈버그를 포함한 7:1의 다수가 이 공립학교의 입학 정책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하고 그녀가 다수 의견을 작성합니다. 판결문에 “여성의 조건에 대한 일반화나, 대부분 여성에게 무엇이 적절한가에 대한 추정을 바탕으로 재능이나 능력이 평균을 벗어나는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다”라고 강변합니다. 긴즈버그가 작성한 판결문과 소수 의견은 명쾌하고 논리적이어서 법학교수들이 상당히 높이 평가한다고 합니다. 

RBG는 강도 높은 운동을 통해 건강을 관리했지만 1999년 이후 각종 암 등 병고에 시달렸습니다. 2020년에 사망하면서 생긴 대법관 공석에 그녀가 싫어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적 성향의 젊은 판사를 지명합니다. 그녀가 좀 일찍 은퇴해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관을 지명하게 했더라면 하고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RBG는 전투적인 자세로 병고와 싸우며 은퇴를 거부해 트럼프 임기를 넘기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過)에 비해 공(功)이 매우 큽니다. 작은 체구의 수줍은, 오페라를 무척 좋아했던 악명 높은 RBG는 여성차별이라는 구약성서 속 거구의 골리앗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그 혜택이 미국 국경을 넘어 많은 곳으로 흐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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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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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근 (220.XXX.XXX.179)
우리의 진보진영도 RBG처럼 논리적으로 보수진영을 설득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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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0 11: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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