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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모래, 은모래의 추억
한만수 2023년 10월 17일 (화) 00:00:10

요즈음은 웬만큼 깊은 산속에 들어가도 계곡에서 물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숲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나무며 풀들이 울창하면 당연히 계곡에서는 일 년 내내 물이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반세기 전에만 해도 나뭇잎까지 땔감이며 퇴비용으로 긁어 가는 통에 동네 근처 산은 거의 민둥산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계곡에는 일 년 내내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계곡의 물은 더럽지 않다는 인식이 있어서 산에서 놀다가, 혹은 나무하다가 목이 마르면 서슴없이 손으로 계곡물을 퍼서 마셨습니다. 

산에 나무는 많은데 계곡의 물이 마르는 이유는 숲을 관리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가 오면 빗물은 땅속으로 스며듭니다.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빗물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산은 서서히 품에 안은 물을 아래로 흘려보냅니다. 그 물이 모여서 계곡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숲을 관리하지 않아서 나뭇잎이며 풀잎 같은 것이 썩어 두툼하게 쌓여 있습니다. 나무들에게는 썩은 나뭇잎이며 풀잎이 퇴비가 되어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나무들은 쑥쑥 자라지만 빗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합니다.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한 비는 곧장 계곡으로 흘러갑니다. 멀쩡한 날에도 산 위쪽에서 소나기가 내리면 흙탕물이 갑자기 산 아래로 흘러오는 원인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1960년대에만 해도 산사태가 크게 없었습니다. 요즈음은 국지성 호우로 인한 산사태가 일어나 동네가 파묻혔다는 뉴스는 새롭지도 않습니다. 

언젠가 산사태로 무너진 산을 본 적이 있습니다. 빵을 뚝 떼어먹은 것처럼 상처를 입은 산이 정말로 보기가 안 좋았습니다. 산사태 나는 것을 본 사람의 말을 들어 봤습니다.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물을 먹다 갑자기 천둥 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답니다. 산 한쪽이 스스로 내려앉더니 펜션 쪽을 향해 막 뛰어오는 것 같더랍니다. 

“어어! 산이 뛰어 내려온다!”
그분은 마당에서 물을 먹던 중이라 고함을 지르며 도망을 쳐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방안에서 밤을 같이 보낸 일행들은 순식간에 산사태에 파묻혔습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러 들어간 친구,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친구, 방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는 모습이 생전의 마지막이라는 말에 저절로 기분이 착 내려앉았습니다. 

계곡에 흐르는 물은 목마름만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투명하도록 맑은 계곡 소(沼)에는 여지없이 중태기라고 하는 중고기가 헤엄치며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급수에만 산다는 노란색 미꾸라지도 있습니다. 큰 돌을 들어 보면 가재가 스르르 도망치는 모습도 볼 수 있고, 밤에 횃불을 치켜들면 팔뚝만 한 산매기도 잡을 수 있습니다.

계곡에 물이 사시사철 흐르니까 천수답도 많았습니다. 저의 고향 같은 경우는 천수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물론 농업인구가 줄어들고 농부들의 나이가 젊어진 원인이 큽니다. 하지만 예전의 천수답은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근처의 계곡과 수로를 연결해 농사를 짓기도 합니다.

계곡에 물이 마르니까 냇물의 폭도 놀랄 정도로 좁아졌습니다. 예전에는 제 키가 작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동네 앞 냇물의 폭이 20여 미터는 넘었던 것 같습니다. 홍수가 지면 폭이 강 못지않게 물이 넘실넘실 흐를 정도였습니다.

얼마 전에 일부러 냇가 둑으로 드라이브를 했습니다. 저 어렸을 때는 경운기도 간신히 다니는 길이 지금은 양쪽에서 오던 자동차들이 비켜설 정도로 넓어졌습니다. 게다가 군 예산이 넘쳐나는지 길만 넓힌 것이 아닙니다. 둑에는 비스듬하게 축대를 쌓아 올려서 저수지가 무너져도 끄떡없을 정도였습니다. 

둑이 높고 축대가 넓어지니까 냇물 폭은 더 좁아졌습니다. 냇가를 상상하면 넓게 깔린 자갈밭이 연상 됩니다. 자갈밭 사이사이에는 숱한 세월 동안 물에 씻겨서 먼지가 나지 않는 금모래 은모래가 깔린 곳이 있습니다. 모래밭을 가만히 지켜보면 잘게 쪼개진 운모 조각은 은빛으로 빛납니다. 깨끗한 모래는 금조각처럼 반짝이기도 합니다.

여름 방학에는 집에서 보리밥을 배 빵빵하도록 먹고 몇몇이 어울려 냇가로 갑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지키는 것도 아닌데 러닝셔츠와 검은색 팬티를 입은 여자애들이 목욕하는 장소는 상류 쪽 물이 얕은 곳입니다.

사내들은 수심이 깊은 곳에서 목욕합니다. 여자애들처럼 팬티를 입지 않고 알몸으로 물속에 들어갑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물을 가슴에 먼저 끼얹고 깊은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갑니다. 

눈을 뜨고 잠수를 하다 보면 피라미며 붕어 모래무지 같은 고기가 헤엄치는 광경이 보입니다. 주로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갈 때는 배영으로 내려갑니다.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갈 때는 개헤엄을 열심히 쳐서 올라갑니다. 높은 바위에 올라가서 고추를 앞장세우고 깊은 물 속으로 다이빙을 합니다. 발이 바닥에 닿으면 힘껏 솟구칩니다. 몇 초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숨을 참으며 물 위로 올라가는 짜릿한 기분, 그리고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푸! 숨을 내뱉으며 뛰어내렸다는 성취감에 활짝 웃기도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친구 녀석은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재미있던지 웃었던 모양입니다. 친구의 뒤를 이어서 연달아 뛰어내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친구의 위쪽 앞니 두 개가 감쪽같이 사려졌습니다. 더 웃기는 것은 정작 본인은 이빨이 두 개씩이나 사라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피 한 방울 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이빨이 빠진 것이 아니고 돌에 부닥쳐 깨진 것입니다.
“너, 이빨 두 개 없어졌어.”
제가 하는 말에 친구는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습니다. 제가 이빨 깨진 쪽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가리켰습니다. 
“어! 내 이빨!”
친구는 일단 혀로 이빨이 깨진 부분을 확인했습니다. 그다음에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고는 으앙! 소리 내 울기 시작했습니다. 

입술이 새파랗도록 목욕을 하고 나오면 으스스 한기가 돕니다. 납작한 돌 두 개를 들어서 양쪽 귀에 대고 고개를 흔들면 귓속에 들어갔던 물이 빠집니다. 그럼 모래밭으로 갑니다.

모래에 왼손을 파묻어 두꺼비 집짓기 놀이를 하기도 하고, 두툼하게 담을 만들어서 자갈과 모래를 이용해 집을 짓기도 합니다. 풀이며 나뭇가지를 꺾어다 감나무며 대추나무처럼 심기도 하고, 고추장을 만든다고 붉은색 돌을 잘게 빻으며 놀다 보면 서서히 배가 고프기 시작합니다. 집에 가 봐야 먹을 것이 없습니다. 어디 참외 서리 할 데는 없나 궁리를 하다 산딸기나 다래, 개암 같은 것을 따 먹을 생각으로 산에 오르기도 합니다. 

지금은 어린 시절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냇가의 자갈밭은 보이지 않습니다. 온갖 풀이 엉켜 자라고 있어서 봇도랑처럼 흐르는 냇가까지는 특별한 목적이 없이는 갈 수 없을 정도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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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222.XXX.XXX.94)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 시절 동심으로 돌아갑니다.아울러 글쓴이와 동시대를 살았다는 친밀감을 느낍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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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7 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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