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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위기 시대에 의료 인문학을 주장하신 분
권오숙 2023년 10월 10일 (화) 00:00:36

며칠 전 자유칼럼그룹 필진들 톡방에 축하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필진 가운데 한 분인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님의 제9회 대한의학회 의학공헌상 수상 소식이었습니다. 막연히 오랫동안 의료계에 종사하시고 국내외 관련 학회의 회장을 역임하시는 등 교육과 연구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신 노고가 인정을 받았나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료 필진들의 축하 인사가 이어지자 감사 인사와 함께 겸연쩍게 수상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이성낙 총장님이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하던 시절에 <의료인문학과 Department of Medical Humanity>를 의대 교육과정에 개설하는 초석을 마련하셨다고 합니다. 그걸 계기로 현재 국내 41개 의과대학에 <의료인문학과>가 개설되었고, 그 공로로 수상을 하셨답니다. 관련 기사를 더 찾아보니 대한 의사회 측에서도 ‘의료 인문학교육 도입 및 의료인의 사회적 역량 강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수상 이유로 밝혔습니다. 

‘의료 인문학’이라는 어휘가 필자의 관심을 확 끌었습니다. 이는 아마 필자가 첨단 과학 기술과 IT 산업이 전 인류의 삶을 지배하면서 점점 입지가 좁아지는 시대에 변변치 못한 인문학자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필자는 의과대학에 이런 학과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궁금증이 발동하여 몇몇 의과대학의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의료의학교실’, ‘인문사회의학과’, ‘의료인문정신분석 전공’ 등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이성낙 총장님의 프로필을 참고해볼 때 관련 작업은 1990년대 중반에 하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는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 종말’ 등의 어휘들이 슬슬 등장하던 시기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일부 대학에서 철학과· 미학과· 어문학과 등이 하나둘 폐과가 되거나 통폐합되고, 1999년에는 <인문학의 위기>(푸른숲) 같은 책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때쯤 대학교 인문학 관련 교수들이 모여 인문학의 위기에 관해 사회의 관심을 북돋우고 위기 해소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위기는 현실이 되어 2012-2020년까지 8년간 국내 인문계열 학과가 무려 148개가 사라졌습니다. (“다가온 ‘인문학 위기’…대학 인문학과 8년새 148개 사라져” <대학저널> 2021, 12, 23)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의대 교수가 의대생들에게 인문학의 필요성을 주창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조심스레 총장님에게 의료인문학에 대해 여쭙는 톡을 보냈습니다. 이에 그런 시도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시초부터 상세히 적어 보내주셨습니다. 편하게 톡으로 주고받은 글을 옮겨 봅니다. 

“의대 입학생들이 하나같이 ‘공부벌레’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변변한 소설책, 시집을 시험문제 목적수단 외 접근하지 않고 있는 참으로 암울한 현실을 못 벗어나는 부끄럽고 참담한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 타령? 그러면, 시인, 극작가, 화가, 건축가 등에게 부탁하여 의대생 상대로 의대에서 강의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청강한 의대생 반응이 대단히 좋았습니다. 그렇게 몇몇 의대에서 시작하였고 <대한의학교육학회>가 전국 의대 교과에 반영할 것을 추천하였고, 결국 모든 의대가 필연적으로 <의료 인문학 교실 Dept. of Medical Humanity>을 개설하도록 의무화하였습니다. Department란 공간, 전임교수, 조교 등등을 구비하여야 하기에 초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전국 의과대학은 주기적으로 평가를 받는데 의료 인문학과가 체크리스트에 있습니다.”

저희 학교 셰익스피어 강좌는 영문학 전공자들을 위한 강의와, 다른 어문학과와 기타 학과 학생들을 위해 개설된 이중전공 강의가 있습니다. 이중전공 강의에 가끔 경영대나 법대 학생들이 수강을 합니다. 그럼 개강하는 날 그들을 유독 반가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미래의 경영인들이나 법 종사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지식과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진정 사회와 인류를 위해 일하는 일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 학교에 의대가 있어 의대생이 제 수업을 수강했다면 역시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것 같습니다. 고통받는 인간을 치유하는 의술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이 필요한 분야이니까요. 

얼핏 문학, 철학, 역사, 종교, 사회, 예술을 포괄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속한 의학은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질병과 노화 문제를 다루고 치유하는 의학과 생로병사를 포함하여 인간 실존의 아픔과 고통을 다루고 치유하는 인문학은 통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요즘 지나친 의대 진학 붐으로 인해 초등학생 때부터 의대 준비반이 운영된다는 씁쓸한 뉴스를 자주 접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의대를 희망하는 아이들은 아픈 이들의 병을 치료해주기 위해 의사가 되고 싶다는 낭만적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제 이런 낭만은 사라졌다 하더라도 지금 의대를 향해 달리는 수많은 인재들이 의료인문학의 도움으로 환자들을 기계적으로 대하지 않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좋은 의사, 전인적 치료자로 성장하기를 고대합니다. 실제 시어머니 생전에 충남 금산의 의사 선생님들은 어머니의 관절을 치료해주고, 혈압약을 처방해주는 역할만 한 게 아니라 외로우신 그분의 하소연을 듣고 외로움을 덜어주는 아들 딸 노릇도 함께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거의 30년 전 이성낙 총장님이 내디딘 첫 발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발걸음이었는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의대 교과에 의료인문학과가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순수 토종입니다.’라는 마지막 첨언에서 그 중요한 교육의 초석을 다진 것에 대한 뿌듯함과 자부심이 전해져 왔습니다. 쪼그라든 인문학 분야에 간신히 매달려 우리 사회에 몹쓸 사건 사고가 날 때마다 인문학의 부재가 부른 결과라고 주장해온 필자에게 이 수상 소식은 마치 외로운 길을 같이 걸어주는 동반자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었습니다. 왠지 늘 필자의 주장이 공허하다 못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의료 인문학 과정이 지금도 의대 평가 체크리스트에 올라가 있다니 얼마나 반갑던지요. 총장님 멋진 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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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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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감 (222.XXX.XXX.55)
이성낙 선생님, 권오숙 선생님,
두 분 선생님 같은 분들이 휘청이는 한국 사회의
기둥이십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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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4 12: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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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숙 (175.XXX.XXX.176)
제 역량은 너무 미약하지만 힘내보겠습니다. 따뜻한 말씀,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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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31 19: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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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용 (220.XXX.XXX.57)
권오숙님께서 2006년 10월부터 지금까지 쓰신 Column을 책으로 폐내시면
어떻까 하는생각이 듭니다.ㅎㅎ
제가 1번으로 구입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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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0 15:25:25
0 0
권오숙 (175.XXX.XXX.176)
아이고, 감사합니다. 좋은 글 조금만 더 써서요.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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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2 17:12:01
0 0
이유근 (220.XXX.XXX.179)
교수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는 김수종 전 한국일보 주필과 함께 제주대학교에서 HRA(Human Renaissance Academy)를 17년째 운영하고 있는 아라요양병원장 이유근입니다. 저의 프로그ㅐㅁ에서는 1년 동안 100권의 고전명작과 기업실무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의 대학 시절 정신과 교수님께서는 의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씀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의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사태에 좌절하지 마시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힘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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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0 10:5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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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숙 (175.XXX.XXX.176)
우와, 정말 멋지십니다. 전 한국 일보 주필이셨던 김수종님이라면 우리 칼럼 선배님 맞으시지요? 이런 훌륭한 활동을 하시면서도 한 말씀도 않으시다니......
저도 정말 힘내야겠습니다. 응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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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2 17: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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