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慈悲) 없는 정의(正義)는 잔인(殘忍)하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무책임하고, 사랑이 없는 정의는 잔인하다.
-정의는 차갑고 몰인정하며 잔인하다.
숱한 성현·석학들이 오래 강조해온 정의, 장삼이사들까지 외쳐대는 정의. 말은 쉽지만 그 정의를 구현하는 행위는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지적은 왜 나왔을까?
# 조선 세종 때 명신 기건(奇虔, ?~1460)은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상민 출신으로 대사헌(大司憲)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출퇴근 때는 가마를 타지 않고 집에서 걸어 다녔고, 제주목사 시절에는 해녀들이 겨울철 찬 바다에서 일하는 노고를 생각하여 3년 동안 전복·해삼 등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청맹과니 행세를 하며 지냈습니다.
수양대군이 그의 재능과 청렴함을 아껴 다시 조정에 나오도록 5번이나 권했으나 거절했습니다. 수양대군은 신하를 보내 과연 청맹과니가 맞는지 확인해 보도록 했습니다. 왕명을 받은 신하가 찾아가 바늘로 눈을 찔러 보았으나 기건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과 정의를 지키려는 결사적 저항이었습니다.
오늘날 서울 청파동은 그의 아호 청파(靑坡)에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 26세에 시카고를 무대로 도박과 마약 밀주 매춘업을 일삼아 ‘밤의 대통령’이 된 갱단 ‘시카고 아웃핏(Chicago Outfit) 두목 알 카포네(1899~1947). 그에게는 범죄 사실을 인멸해 감옥행을 막아주는 충직한 부하 에드워드 조셉 오헤어(1893~1939)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1927년 연간 총수입 1억 달러로 기네스북에 오른 카포네는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아인슈타인과 헨리 포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카포네로부터 도심 한 블록 크기의 저택과 엄청난 돈을 받고 호화생활을 누리던 오헤어는 양심과 정의를 저버린 자신의 죄업에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겠다고 결심하고 1939년 카포네의 모든 범죄행각을 사정당국에 고발했습니다.
마피아의 세상은 서서히 막을 내렸지만 오헤어 변호사는 그해가 끝나기 전 시 외곽 외딴곳에서 마피아가 난사한 총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 그의 아들 에드워드 헨리 오헤어(1914~1943)는 태평양전쟁 때 항모 렉싱턴의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습니다. 어느 날 순찰 비행 중 연료 부족으로 혼자 귀환하다 저공으로 렉싱턴을 향하는 대규모 일본 전투기 편대를 발견했습니다. 보고할 틈도 없이 헨리는 일본 전투기에 기총을 난사해 9대를 격추하고 일본기 편대의 기수를 돌리게 했습니다. 무방비 상태의 항공모함 승조원 2,800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오헤어는 이 전공으로 의회명예훈장을 받고, 2계급을 특진해 소령으로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1년 뒤 한 공중전투에서 장렬하게 산화했습니다. 그의 족적은 신형 오헤어 구축함(1945년)과 시카고 최대의 오차드 디포트 공항을 개명(1949년)한 오헤어 국제공항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대(代)를 이은 정의는 혁혁한 이름을 남겼지만 오헤어 부자의 생은 굵고 짧았습니다.
공직자 변호사 군인 모두에게 짐 지워진 멍에 정의. 그 정의를 제대로 구현하는 삶은 참으로 험난하고 잔인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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