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노경아 쉼표
     
너무나도 낯선 '트로피 부부'
노경아 2023년 09월 22일 (금) 00:00:30

마뫼. 남산공원 근처에 있는 카페 이름이에요. 작은 공간이지만 창이 많아서 남산 품은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아요. 우산 없이 걷다가 소나기를 만나는 바람에 들어갔는데, 한참을 멍 때리다 나왔어요. 

 
  부부는 같은 곳을 보고 함께 걸어가는 사이입니다. 긴 세월 걷다 보면 서로 눈을 반쯤 감아주는 배려와, 힘들 때 토닥여주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마뫼의 '마'는 '앞', 뫼는 산의 순우리말. 그러니까 마뫼는 앞산, 남산과 같은 말이구나 생각하며 비 그친 산책로를 걷는데 앞서 가는 남녀가 눈에 들어왔어요. 맨발로 걷는 남자와, 한 손엔 그 남자의 신발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연신 남자를 부채질해주는 여자. 백발의 뒷모습만으로 엄만가 싶었는데, 그러기엔 여자의 걸음걸이에 힘이 넘쳐납니다. 속도를 내 그들을 앞질러 돌아보니 50대 중후반의 남녀입니다. 꾸미지 않은 차림으로 봐서 99.9% 부부입니다. 

산을 내려와 회사 사람들과 차 한잔하며 그들 이야기를 했어요. 무거운 남자 등산화를 들고 걷는 여자, 편안하게 맨발로 걷는 남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평소 남자가 여자한테 엄청 잘하나 봐요.” “남자가 가부장적인 사람일지도 몰라요.” “남자가 어디 아픈 거 아닐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30대 후배가 툭 내뱉은 용어에 다들 뭐지 하는 표정을 지었어요. “트로피 남편일걸요. 고맙고 안됐잖아요. 휴일, 밖에 나와서만큼은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트로피 남편(Trophy Husband)이라니, 세상에 별의별 남편이 다 있다 싶었어요. 검색해 보니 성공한 아내 대신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남편입니다. 한마디로 ‘외조의 왕’, 트로피를 받을 만한 남편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살림깨나 잘하게 생겼던 것 같기도 해요. 무거운 등산화를 들고도 웃으며 힘차게 걷던 그 여자, 직장에서 잘나갈 것 같기도 하고요.

트로피 남편이 최근에 생긴 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어요. ‘IT업계의 여제’ 칼리 피오리나가 1999년 휴렛패커드 최고경영자에 올랐을 때 그녀의 남편 프랑크 피오리나는 명함에 ‘칼리 피오리나의 외조자’라는 직함을 새기고 다닐 정도로 외조에 헌신적이었대요. 앞서 그녀가 루슨트테크놀로지 최고경영자에 올랐을 때 그는 AT&T 부사장이었는데, 곧장 그 자리를 내놓고 전업주부 선언을 했다네요. 실제로 그는 아내가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가사와 육아를 도맡아 했고요. 

비틀스 멤버 존 레넌도 오노 요코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집에 들어앉아 요리와 청소를 하고 육아에 전념했어요. 당시 그는 스스로를 '주부 남편'이라고 칭해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201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에릭 베치그, 미국 프로야구 선수 빌리 애슐리 등도 트로피 남편으로 손꼽힙니다.

트로피 아내(Trophy Wife)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트로피 남편과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 혹은 돈 많은 중장년의 남성이 트로피처럼 반짝이는 미모의 젊은 아내를 둔 걸 뜻해요. 트로피 아내를 둔 대표적 인물로 ‘실리콘밸리의 악동’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이 늘 입에 오릅니다. 그는 트로피 아내를 무려 세 차례나 갈아 치웠는데, 네 번째 아내하고도 헤어졌다죠. 그 많은 아내 중 두 번째는 회사 안내 데스크 여직원이었다네요. 

트로피 부부, 행복할까요? 저는 번쩍거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좀 부정적이에요. 번쩍거리는 물건은 매일 닦아야 하는데, 그냥 둬서 먼지가 쌓이면 평범한 것보다 더 초라해 보이니까요. 함민복의 시 ‘부부’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마음 편합니다. 

“긴 상이 있다/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좁은 문이 나타나면/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걸음을 옮겨야 한다/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다 온 것 같다고/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한 발/또 한 발”

 

자유칼럼의 글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3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정병용 (220.XXX.XXX.57)
안녕 하십니까?
약 3개월만에 노 Columnist님의 Column을 읽게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그동안 잘 계셨죠? 반갑습니다.
오늘은 Trophy Husband 와 Trophy Wife ---
평생 처음들어 보는 단어네요? 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Trophy Husband 는 아니고, Trophy Wife에 속한거 같네요 ㅎ
아무튼 건강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짱이여서 두서없는 의견 올려봅니다. 항상 건행하시고, 즐거운 추석명절 보네요용~~
답변달기
2023-09-22 13:33:07
0 0
노경아 (116.XXX.XXX.129)
대표님,
오랜만에 뵈오니 저도 몹시 반갑습니다.
저 역시 트로피 부부는 처음 들어본 말이라 적잖이 놀랐습니다. ㅎㅎ
세상엔 참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있구나 싶었습니다.
대표님의 글에서도 건강과 행복이 보입니다. 보름달처럼 환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늘 고맙습니다^^
답변달기
2023-09-24 14:30:32
0 0
정병용 (220.XXX.XXX.57)
감사 합니다.
늘(항상) 건행하세요~~~
답변달기
2023-09-25 09:55:23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