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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마저 못 느낀 아쉬움
홍승철 2023년 09월 20일 (수) 00:00:35

계절이 바뀌면 그때마다 계절에 따른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어느 계절이 특별히 좋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나름대로의 운치를 즐기기도 하고 따뜻한 방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만의 정취를 맛보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더운 여름은 지내기가 힘들다고 여겨 왔습니다. 한창 더위가 계속될 때에 마음 한쪽에는 정감을 느끼게 하는 시기의 기대가 있었습니다. 늦여름 저녁입니다. 해진 후 어두워지기까지의 시간, 노을이 약간이라도 낀 서쪽 하늘을 좋아합니다. 잠시 앉아 있으면 무언가 생각이 떠오를 것 같아지는 때입니다. 학생 때부터 그랬으니 소박하지만 오래 지속된 일입니다.

그 늦여름이 내겐 8월 하순이라고 못 박혀 있었습니다. 학생 때 여름방학이 끝나가던 일과 연관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올여름은 너무 더웠습니다. 그러더니 8월이 다 지나도록 늦여름은 오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입추가 되면 젊은 여인들의 옷차림이 변한 걸 볼 수 있었는데, 올해는 9월에 접어들도록 여인들은 한여름 옷차림이었으니 말입니다. 요 며칠 사이에 저녁이 되면 온도가 내려감을 느낍니다. 이제야 늦여름인가 생각해 보아도 하늘을 쳐다보면 이전의 늦여름 빛깔과는 다르게 보입니다. 

지난달 읽은 책 생각이 납니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악』을 읽으면서 한 책에 같이 있는 『좁은 문』도 읽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도서관에 대출 기간 연장 신청을 하고 8월 하순경에 읽었습니다.

『좁은 문』은 학생 때 한번 읽었습니다. 이후 머릿속에 남은 생각은 왜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하지를 않고 지내면서 불행을 겪는가 하는 의문뿐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언젠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읽어 보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생각만 하다가 지난달 책이 손에 들어왔으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기억이 이렇게 틀릴 수 있구나 생각하니 말입니다. 제롬과 알리사는 어릴 때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인 건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알리사는 동생 줄리에트도 제롬을 연모한다는 사실을 알고 제롬과의 결혼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슬픈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왜 기억 속에 그 사실이 없고 사랑하면서도 서로 결합하지 못하는 일만 남았을까요? 기억은 역시 잘못된 것이 많다고 확인하였습니다. 어쩌면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읽을 때부터 어떤 사실은 간과하고 특정 사실에만 집중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야기의 결말도 아예 기억 속에 없다가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알리사는 여러 해가 지나 병약해져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전에 줄리에트는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나서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잘 지내지만 제롬을 연모하는 마음은 끝까지 지녔습니다. 나이든 지금 읽으면서도 감정이 약간은 움직였습니다. 흥미 없는 애정 드라마를 아내 옆에 앉은 이유로 보다가 가끔 이야기 속에 빠져들기도 하는 일과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되나 봅니다.

기억이 틀린 걸 이번에 알게 되었지만, 오래 생각 못하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대학생 때 처음 읽으면서 제롬과 알리사가 사촌 간이라는 사실에 잠시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중학교 시절 한 사촌 누이를 처음 만나본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사촌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했는데... (프랑스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인가?)’ 중학교 때의 일기장 어느 부분에 짧게 그 일을 쓴 일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설 속에서 ‘저속한 신앙에 관한 너저분한 작은 책’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곧이어 책 제목이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저속한 신앙에 관한 책’의 예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기억났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의 번역본에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이 책은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난 뒤 후암동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영문판을 구입했습니다. 영문 제목은 『the Imitation of Christ』였습니다. 제롬과 알리사의 이야기에 대한 기억 때문에 산 것이지만 읽지는 않았습니다.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더위 때문에 힘들었고 늦여름 저녁의 정취를 다른 해만큼 맛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8월 하순에 오래전 기억을 되짚어준 책이라도 읽었고 그 옛날의 감정도 잠시 회상했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있었으니 늦여름다운 늦여름이 없어진 아쉬움을 달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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