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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들으며
임철순 2023년 09월 18일 (월) 00:00:04

대통령은 왜 인사를 그렇게 하고 적대적인 말을 그리 쉽게도 하는지, 야당 대표는 왜 뜬금없이 단식을 하는지, 그렇게 오래 굶고도 당뇨환자가 어떻게 버티는지, “금도를 넘어선 집단”이라고 대통령실을 비난하는 야당 의원은 어떻게 금도(襟度)라는 말의 뜻도 모르는지.... 궁금하지만 더 알고 싶지 않고, 답답하지만 더 묻고 싶지 않은 뉴스일색입니다. 직업상 어쩔 수 없어 뉴스를 섭취하고는 있지만 소화불량에다 구역(嘔逆), 오심(惡心)이 납니다. 

   
  요셉 아벨 작 '젊은 남자의 초상'.
슈베르트 열일곱 살 때의 모습이다.
 

그렇게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주말에 슈베르트(1797~1828)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A단조 D.821’을 들었습니다. 청랑하고 삽상하며 흐트러지지 않은 슬픔을 담은 명곡입니다. 맑고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눈물의 음악’은 언제나 위안을 줍니다. 그가 일기에 쓴 대로 “슬픔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다. 슬픔은 정신을 강하게 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1823년 악기 제작자 게오르크 슈타우퍼가 개발한 아르페지오네는 10여 년 만에 없어진 악기입니다. 이 악기 음악으로는 1824년에 작곡된 슈베르트의 작품이 유일한데, 사망 43년이 지난 1871년에야 악보가 출판됐으니 일종의 유작인 셈입니다. 지금은 아르페지오네 대신 첼로로 연주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음반은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의 첼로와 벤자민 브리튼(1913~1976)의 피아노 협연으로, 이 소나타의 가장 유명하고 권위 있는 녹음(1968년)입니다. 호소하는 듯 탄식하는 듯 첼로가 읊조리면 투명하고 차분하게 피아노가 발걸음을 잡아주고 길을 알려줍니다. 주고받는 이야기가 슬픈 듯하면서도 맑고 우아하고 따뜻합니다. 

   
  첼리스트 마리아 클리겔. 2019년 연주회 때 촬영.  

그걸 되풀이해 듣다가 또 다른 아르페지오네 CD를 ‘발견’했습니다. ‘이게 언제 산 건가, 연주자는 누구지’ 하고 들여다보니 독일의 두 여성 마리아 클리겔(Maria Kliegel, 1952~ )의 첼로와 크리스틴 메르셔(Kristin Merscher, 1961~ )의 피아노 협연(1991년 녹음)이었습니다. 야노스 슈타커(1924~2013)의 제자인 클리겔은 1981년 제2회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파리)에서 대상을 받았고, 지금까지 60여 장의 음반을 낸 연주자입니다. 1986년부터 독일 쾰른 국립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6년에 내한 공연을 한 바 있습니다. 

클리겔의 경력 중 인상적인 것은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1918~2013)와의 인연입니다. 27년여 동안 복역했던 그는 199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데 이어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듬해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을 냈습니다. 1995년에 자서전을 읽고 감동한 클리겔은 서양음악의 전통 악기인 첼로와, 남아공의 감성을 담은 타악기 협연곡을 만들어 헌정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작곡가 빌헬름 카이저-린데만(1940~2010)에 의뢰해 곡을 완성한 뒤 요하네스 라우(1931~2006) 당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총리(나중에 독일 대통령)를 통해 방독 중인 만델라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희망과 달리 남아공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고, 이 곡은 1996년 12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초연됐습니다. 클리겔은 1997년 9월 24일 남아공 문화유산의 날에 케이프타운에 와서 공연하라는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맨 앞줄에 앉아야 할 만델라는 다른 일 때문에 하루 전에 참석을 취소하고, 절친(만델라 다음 대통령인 타보 음베키 부통령의 아버지)을 대신 보냈습니다. 

   
  넬슨 만델라와 마리아 클리겔.  

실망한 클리겔이 독일로 돌아온 몇 주 뒤, 만델라는 케이프타운의 대통령 공관으로 초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둘은 드디어 1997년 11월 11일에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클리겔은 첼로 독주를 들려주고 연주가 끝난 뒤 장미 덩굴을 선물했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식물을 사랑했으며 감옥에서도 꽃을 기른 사실을 자서전에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만델라는 두 사람의 유대를 지속시켜 줄 장미를 잘 기르겠다며 깊이 감사했습니다. ‘첼로와 타악기의 넬슨 만델라 오마주’ 곡은 1999년 클리겔과 슈테판 프로레익스(1962~ )의 협연으로 녹음돼 발매됐습니다. 수익금은 넬슨 만델라 어린이기금에 기부됐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니 클리겔의 연주가 더 새롭게 들립니다.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 미 대통령이 암살됐을 때, 시인 월트 휘트먼(1819~1892)은 ‘라일락이 앞뜰에 피었을 때’라는 애도시를 지었습니다. 불세출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는 존경하던 케네디(1917~1963)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초청하자 1961년 11월 13일 ‘새들의 노래’를 연주했습니다. 그가 “하늘의 새들이 ‘평화, 평화, 평화’ 하고 노래 부른다.”고 설명한 바 있는 곡입니다. 카잘스는 1963년 12월 초 대통령 자유훈장 수여식에서 그를 다시 만날 것을 기대했으나 케네디 대통령이 11월 22일 암살당해 재회하지 못한 것을 슬퍼했습니다. 

문화예술인이 정치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남들보다 유리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런 사람들에 의해 문화예술 활동이 진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클리겔처럼 적극적으로 순수한 존경을 실천한 예술가는 보기 드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 정치인들을 돌아보면 참 비루하고 구차하기 짝이 없습니다. 존경은 커녕 타기(唾棄)의 대상이 아니면 다행이지요.

그렇거나 아니거나 하얀 메밀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났고, 하늘은 점차 높고 푸르러지면서 하늬바람이 불어옵니다. 추분(9.23)과 한가위가 가까워지는 이때가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듣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입니다. 바흐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작 말러, 다 좋지만 나는 슈베르트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자장가’도 슈베르트의 작품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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