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허찬국 경제기행
     
정신건강과 지휘자 가디너
허찬국 2023년 09월 08일 (금) 00:00:25

영국의 음악가 가디너(80, John Eliot Gardiner)는 케임브리지 대학 학생 시절(1964년)에 몬테베르디 합창단을 창단하여 이끌며 세계적인 지휘자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9월 초 예정되었던 BBC프롬 공연에 출연하지 않고 대신 부지휘자가 공연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합창단이 유명해지는 데 크게 기여했던 바흐의 성악곡을 자주 듣는데, 몬테베르디 탄생 450주년을 기념한 오페라 <오르페오와 유리디체> 공연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2020. 10. 28 자유칼럼 ‘오르페오와 유리디체’ 참조, 작년까지 유튜브에서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DVD로 판매되며 사라짐). 

 
  지휘자 가디너 2017년, 영국 가디언지 기사 사진 캡처 

성악뿐만 아니라 과거에 사용되었던 원전 악기를 사용하는 고(古)음악 전문 관현악단 ‘혁명과 낭만의 관현악단(the Orchestre Révolutionnaire et Romantique)’를 창단하고, 비슷한 성격의 ‘영국 바로크 솔로이스츠(English Baroque Soloists)’를 이끌며 바로크 음악의 대가로 자리매김했지요, 올 5월 있었던 영국 찰스 3세의 대관식에서도 식전(式前) 음악을 담당했는데, 왕과도 친분관계가 있다 합니다. 헌데 8월 초부터 한 달간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열리는 BBC프롬의 9월 초 공연 출연을 취소한 연유를 살펴보면 누구든 정신건강 문제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소식이 관심거리가 된 것은 필자가 2013년 8월 처음으로 BBC프롬을 직관했을 때 가디너가 지휘하는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영국 바로크 솔로이스츠의 공연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흐의 <부활절 오라토리오>와 <승천절 오라토리오>였는데 두 곡은 각각 30분이 넘는 곡입니다. 첫 프롬 공연의 인상적 장면들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공연장이 상당히 컸고, 보통 연주회장에서 제일 비싼 오케스트라석(席)이 위치한 무대 바로 앞 타원형 공간에는 의자가 없이 비어있습니다. 표 값이 제일 저렴한 이곳은 관람객이 서서 연주를 감상하는 입석 구역입니다. 공연이 시작될 때쯤 이 구역은 사람들로 찼습니다. 그해 70세였던 가디너가 이끄는 합창단, 관현악단의 연주도 인상적이었고, 휴식 시간 없이 70분 내내 선 채로 음악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의 열정과 체력 또한 대단했습니다. 

   
  (왼쪽) 2013년 8월 BBC프롬, 필자도 딸과 함께 무대 앞 관람객 가운데 서있었음
(오른쪽) 2013년 8월 공연 후 인사하는 가디너와 공연자들
 

가디너의 9월 출연 취소는 2주 전 프랑스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고향에서 매년 열리는 음악제 공연 후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입니다. 그는 '혁명과 낭만의 관현악단'을 이끌고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을 공연했는데, 출연자 중 남자 성악가(William Thomas)가 무대에서 내려올 때 동선이 잘못된 것을 질책하며 사건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20대 베이스 가수가 대꾸하자 80세 가디너가 출연진 앞에서 그의 뺨을 때리고 주먹질을 했다는 겁니다. 고성이 오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니 젊은 성악가가 자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망한 성악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피해자가 그냥 넘어갈 리 없고, 위계가 방어막 구실을 못하는 요즘 분위기를 감안하면 상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바로 다음날 가디너는 영국으로 떠났고, 베를리오즈 오페라 공연은 부지휘자(Dinis Sousa)가 대신 진행했습니다. 연이어 예정된 잘츠부르크, 베르사유, 베를린, BBC프롬의 <트로이 사람들> 공연도 부지휘자가 이끌었다고 합니다.

베를리오즈가 관련 원작 서사시를 바탕으로 직접 프랑스어(語) 대본을 쓰며 공을 들인 이 5막 오페라는 공연 시간이 4시간 넘는 대작으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연작 오페라와 비교되기도 하고 자주 공연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공연이 쉽지 않았으리라 추측됩니다. 가디너가 며칠이 되지 않아 성명을 발표하며 자신의 행동을 진솔하게 사과한 것은 다행입니다. “본인의 행동이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음을 알고 있으며, 매우 존경하는 윌 토머스에게도 개인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다시 한 번 그와 다른 음악가들에게도 본인 행동이 끼친 폐해에 대해 깊이 사과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자신은 영국으로 돌아왔고 남은 공연 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지휘자와 악단의 성공을 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폭력은 절대 용납되지 않으며 음악가들은 항상 안전하다고 느껴야 합니다. 저의 행동에 대해 제가 반성하는 동안 여러분의 인내와 이해를 구합니다.”

바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한 것은 바람직한 대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영미 언론 기사들에 따르면 과거에도 가디너가 연주자들에 무례하게 했던 일이 심심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필자와 같은 범부가 재능과 지능이 뛰어나고 인상도 좋은 예술가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지요. 감히 추측해보면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통제하는 연주단체를 만들고 이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당시 흔치 않았던 원전음악 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하면서 완벽주의가 되었고, 독선적인 경향도 커졌을 듯합니다. 과거 소위 제왕적 지휘자들이 드물지 않았다고 하지요. 재능만큼 인성을 강조하는 예술가 지인이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이 글의 초본을 마친 8월 말 가디너의 소속사는 그가 9월 BBC프롬뿐 아니라 올해 남은 모든 연주 일정 출연을 취소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정신과 치료에 전념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다시 사과하고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달라는 부탁도 덧붙였습니다. 아직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거장이 정신건강을 회복하고 좀 더 너그러워진 모습으로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BBC프롬 무대에서 다시 볼 기회가 있기를 빌어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