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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맞닥뜨린 위험사회
권오숙 2023년 08월 31일 (목) 00:13:50

우리 아파트 바로 앞에는 작은 공원을 끼고 오르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습니다. 작년 3월 갑자기 몸에 큰 이상이 생기면서 난생처음 운동이라는 걸 시작했습니다. 만보기를 켜고 공원을 열심히 돌 때도 있고, 뭔가 더 의욕이 솟을 때는 동산을 올랐습니다. 한 20분만 올라가면 각종 운동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는 산꼭대기에 다다릅니다. 푸릇푸릇한 숲을 마주 보며 자전거도 타고, 허리도 돌리고, 달리기도 합니다. 공원 산책로와 앞동산은 그동안 내 건강 지킴이 노릇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신림동의 한 공원에서 있었던 여교사 성폭행 살인 사건 이후 이 장소들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신림동의 그곳도 우리 동네 공원이나 야산과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날 이후 갑자기 한여름 녹음이 짙게 깔린 공원의 숲이 너무 어둡고 음침해 보입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울창한 나무 터널이 햇볕을 가려주는 그늘에서 운동할 수 있음에 축복과 감사를 느꼈는데 말입니다. 

최근 몇 달 사이 우리 사회를 경악시킨 전대미문의 범죄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 뒤에도 매일매일 새로운 흉기 난동 소식이 들려오고, 숱한 범죄 예고 글들이 우리 사회 전체를 불안감에 떨게 합니다. 그동안 나름 치안 안전 국가로 인정받던 우리나라에서 왜 갑자기 이런 사건들이 쓰나미처럼 터지는 거지? 라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가 막연히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무의식중에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이 병이 들면 의사는 그 병 자체를 치료하는 수술이나 약을 처방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환자의 체질 자체를 건강하게 바꾸는 식습관이나 운동을 반드시 함께 권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병든 개인 같습니다. 사회 곳곳이 곪아 터지고 암세포 같은 존재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각 사건의 범인을 잡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처벌하는 개별적 처방만 가지고는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은 치유되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거시적인 논의와 시도들이 다급해 보입니다. 현상의 실재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우리 사회가 잉태하고 있는 근본적 문제를 인식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종과 경제 논리에 대한 맹목성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산업이든 제도 혹은 정책이든 그것이 안고 있는 잠재적 위험성이 커 보여도 눈앞에 보이는 실리, 즉 국가 경쟁력 제고, 실업 문제 해결, 경제 성장 등에 미치는 효과를 내세우면 늘 함구해야 했습니다.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대두되었던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가 그랬고, AI가 불러올 인간 노동력의 대체 문제 또한 그렇습니다. 인류는 그것들이 불러올 미래 재난을 예측하면서도 당장 그것들이 갖다 줄 경제적 이득이나 편리성 때문에 눈감아 왔습니다. 

게임 산업 얘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딱 제 아이들이 초등 저학년일 때부터 각종 인터넷 게임이 개발되고 아이들은 그것에 중독되어갔습니다. 당시 엄마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을 게임과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스트리트 파이터’나 ‘스타크래프트’ 같은 폭력과 유혈이 낭자한 게임에 빠져 사는 것이 자녀들의 정신과 인성,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자녀들 간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그것은 아이들의 방과 후 시간을 통제할 수 없는 워킹 맘의 최대 고민이었습니다. 당시 엄마들끼리 기발한 노하우들을 공유하곤 했는데, 고육지책으로 모니터나 마우스를 가지고 출근하는 엄마들의 시도가 인기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게임 산업이 문화 산업이요 효자 수출 산업이라며 국가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권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게임 개발 회사들에 각종 혜택을 주며 자본을 투자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들도 더 이상 자녀들의 게임을 막을 논리를 잃었고 자신들이 괜한 우려를 했던 건가 하며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한때 프로게이머가 되는 게 많은 아이들의 미래 꿈이기도 했지요. 그 후 핸드폰 게임까지 등장하며 아주 어린 아이들조차 기기를 끼고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시적 경제 효과가 잠재적 위험성을 눌러 버린 것이지요. 

이번에는 교육 문제를 한번 들여다볼까요? 이미 우리 교육에서 인성 교육이니 가치관 교육을 운운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으로 치부됩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세대 대다수의 부모가 자녀 좋은 대학 보내기에만 온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들이 건강한 가치관과 따뜻한 마음으로 아름답게 사는 것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혀도 책이 주는 본질적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활 기록부에 한 줄 쓸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일 때가 많았습니다. 자녀들이 끔찍한 학교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도 그 잘못을 따끔하게 혼내서 바로잡기보다는 그 기록이 아이 발목을 잡지 않도록 지우는 데만 급급했음이 요즘 계속 드러나고 있죠. 이런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공부만 잘하고 좋은 대학만 가면 최고라는 인식이 아이들에게도 주입되었습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내 친구도 잘 살고, 공동체가 건강해야 나도 안전하고 행복하다는 인식 따위는 가르치질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묻지 마 범죄는 그런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잠재적 위험성이 마침내 가시화된 것입니다. 오로지 경제적 성공과 출세만을 향해 달리면서 그 밖의 모든 가치는 내던진 개인주의와 경쟁주의가 불러온 결과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산업 발전과 근대화가 부른 자연 파괴의 결과, 최근 벌어진 하와이 산불 같은 기후 재난들이 전 세계에서 속속 가시화되듯이 말입니다. 이제 지구 생태계 문제는 우리가 막을 수도 피해갈 수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감내해야 할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비가시성과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외면해 온 위험들이 가시화되면서 안전에 대한 믿음이 와해되고 사회 질서의 근본이 흔들리는 지경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부의 생산을 최우선 순위에 둔 자본주의의 맹목성과 과학, 기술에 대한 맹종이 마침내 위험사회로 귀착되는 걸 목도하는 순간에 다다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 사회는 그 근본 문제를 직시하기를 회피하고, 매일매일 일어나는 사건 사고만 시끄럽고 요란스레 떠벌리고 있는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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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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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용 (220.XXX.XXX.57)
마음에 양식이 되는 좋은 Column 잘 읽고 갑니다.
권오숙님의 칼럼을 모으고 있습니다.
건행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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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10: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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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숙 (175.XXX.XXX.176)
감사합니다. 더 좋은 글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답변달기
2023-09-01 21: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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