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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비밀이 네모나?”
함인희 2023년 08월 28일 (월) 00:01:58

요즘 제 친구들이 너도나도 할머니 타이틀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생일이 빠른 친구들끼리 어울려 ‘지공거사’(지하철 공짜로 탈 수 있는)됨을 자축해서 춘천까지 놀러 갔다 오기도 했답니다. 올봄 대학 동창 모임에 친구가 입술에 물집이 잡힌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논문 쓸 때도 안 생기던 물집인데, 손자 돌보는 일이 더 고되네.” 하며 멋쩍게 웃더라구요.

미디어에는 손자손녀 돌보느라 노후를 빼앗긴 신(新)노년층의 우울한 스토리가 단골로 등장하지만, 할머니 역할이 그렇게 고달프고 심란하기만 한 건 아니랍니다.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인즉, 아들딸은 잘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에 재미도 기쁨도 제대로 몰랐지만, 손주는 무조건 마냥 예뻐하기만 해도 돼서 정말 좋다는 겁니다. 물론 손자손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고들 하지만, 이 말은 어른들끼리만 살던 집에 갑자기 아이가 찾아오면 번잡하기도 하고 번거롭기도 하다는 의미이구요, 시간이 흐르면 속절없이 보고 싶은 것이 손주 녀석들이지요.

할머니의 존재 이유에 관한 진화생물학의 주장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대부분의 생물은 번식 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죽고 마는데, 완경을 하고도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하는 포유류가 두 종이 있다네요. 하나는 인간이요 다른 하나는 고래인데, 고래 중엔 범고래 돌쇠고래 흑범고래가 해당된답니다. 번식 능력이 사라졌음에도 생존하는 이유는 진화의 원리상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어쨌든 종의 지속 및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론에는 이의가 없답니다. 

상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출산(재생산)도 생산 노동도 젊은 엄마의 몫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자기 아이를 돌봐줄 여력이 크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 공백을 메꿔준 것이 바로 할머니들이라는 거지요. 집단생활을 하는 고래도, 위기에 봉착하는 순간 할머니 고래가 앞장서서 위기를 헤쳐 가는 모습이 실제 목격되었다고 합니다. 

저희 집안에선 코로나19 위기 때 무려 다섯 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답니다. 용기를 낸 며느리들이 참으로 기특하더라구요. 약사인 조카네 아들은 외할머니가 출퇴근 하며 돌봐주고 있고, 대기업 과장인 조카네 딸은 가까이 사는 친할머니가 돌봐줍니다. 친정 언니네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사는 요즘 보기 드문 확대가족인데요, “시어머님 안 계셨더라면 주원(아들 이름)이 낳을 엄두조차 못 냈을 거예요.”가 며느리의 솔직한 심정이라네요. 

저도 마흔셋 되던 해 여름, 할머니가 되었답니다. 자세한 사연은 개인정보(?)라 소상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사촌 조카네를 1년가량 데리고 살기로 했는데 그사이 손주 녀석이 태어난 겁니다. 덕분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구요,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답니다. 손주 녀석은 똥냄새도 향기롭다 했던 어른들 말씀도 거짓이 아님을 알았구요. 

함께 살기로 약속했던 1년은 손주 녀석이 초등학교 3학년 될 때까지로 이어졌는데요, 그때가 제겐 리즈 시절(?)이었답니다. 녀석이 한 돌 조금 지났을 때 처음 미장원에 갔는데, 미용사가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는 순간 왕 울음을 터뜨리더라구요.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이는 녀석을 꼬옥 안은 채, 제 몸 가득 녀석 머리카락으로 샤워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일하는 할머니 입장에서 가끔은 워라밸 때문에 당혹스러운 적이 있었답니다. 일찍 퇴근해서 녀석을 돌봐주기로 약속했는데 중요한 회의 일정이 잡히는 겁니다. 물론 저는 당당하게 회의 제치고 녀석을 만나러 집으로 향했답니다. 회의야 제가 없어도 별 지장 없지만, 녀석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착각하면서요. 초보 할머니의 손주 짝사랑은 정말 못 말리는 수준이었습지요. 

하지만 이 할머니에게도 웃픈 사연이 있었답니다. 엄마 몰래 사탕 과자 아이스크림을 사주곤 했는데, 그만 녀석 이빨에 충치가 생겨 어린이 전용 치과에 가서 수면 마취한 채 수술하는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도 정신 못 차린 이 할머니, 어느 날 녀석 손을 잡고 어린이집 데려다주는 길에 네모난 초콜릿을 쥐여주면서 “엄마에겐 비밀이야” 했더니,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묻더라구요. “할머니, 비밀이 네모나?”

녀석은 초등학교 3학년 되던 해 판교로 이사를 가게 되어 저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할머니는 영원한 할머니인지라,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녀석을 만나러 갑니다. 험난한 세상, 무조건 네 편인 사람이 한 명 더 있음을 기억해주길 바라면서, 두둑한 용돈에 할머니 사랑도 넉넉히 담은 연애편지를 건네주지요. 그러고 보니 8월 28일 오늘이 바로 녀석 귀빠진 날이네요. 어느새 스물한 살. 키가 부쩍 자랐듯이 마음도 훌쩍 자라길 응원한다, 규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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