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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막에서 하룻밤을
한만수 2023년 08월 07일 (월) 00:00:14

요즈음 참외가 제철입니다. 참외를 보면 자연스럽게 원두막이 떠오릅니다. 요즘처럼 비닐하우스에 참외를 재배하지 않던 시절에는 노지에 심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 참외밭을 보면 노랗게 익어가는 참외보다는 원두막이 먼저 눈에 띕니다. 원두막에 주인이 보이지 않으면 한 개 따 먹고 싶은 충동에 군침을 삼키며 바라보기 예사입니다.

원두막에 앉아서 참외밭을 지키는 일은 대게 연세가 많으신 분들의 몫입니다. 원두막에 앉아 한가롭게 부채질을 하거나, 저고리 고름을 풀어 헤치고 낮잠을 주무시기도 합니다. 

장날 아침이 되면 바지게 가득 참외를 담습니다. 햇볕에 참외가 뜨거워지지 않도록 참외줄기로 덮거나 버드나무가지 같은 것으로 덮어서 채소전으로 지고 가서 지게를 받쳐둡니다. 요즘 마트처럼 참외를 깎아서 시식을 시켜주거나, 참외가 달고 맛있다며 호객을 하지 않습니다. 지게에 얹은 바지게 그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거나,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거나, 끄덕끄덕 졸기도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팔기 시작하는 참외를 언제 다 팔게 될지 괜히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파장 전에 참외가 다 팔립니다. 참외 판 돈으로 어물전에서 자반고등어를 사거나, 고무신 가게에서 고무신을 사기도 하고, 장날만 문을 여는 국밥집에 들러 취기가 거나하게 돌도록 막걸리를 마시기도 합니다.

​저하고는 친하지도 않고 이름만 알고 지내는 진옥이라는 형은 나이가 서너 살 많았습니다.  진옥이 형하고 나이가 같은 동네 형들은 어렸을 때부터 장터에서 깡통차기나, 자치기 같은 것을 하며 지냈던 까닭에 어렵지가 않았습니다. 
진옥이 형하고는 말을 섞지도 않은 데다 덩치도 컸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객지에 나가 돈을 벌다가 군대 갈 때가 돼서 집에 내려와 있는 중이라 같이 어울릴 기회도 없습니다.

하루는 진옥이 형 집 근처에 사는 친구가 저녁 먹고 원두막에 놀러가자고 말했습니다. 진옥이 형이 밤마다 담뱃값 정도를 받고 원두막에서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진옥이 형은 서울에서 룸살롱의 새끼웨이터로 일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다는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 귀에 여자들을 잘 안다는 말은 달콤하게 들렸습니다. 덧붙여서 소주를 사들고 가서 진옥이 형이 취해 잠이 들면 참외를 따 먹자는 음모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3명이 저녁을 먹고 장터에서 만났습니다. 돈을 걷어서 4홉들이 소주 두 병을 사 들고 원두막으로 갔습니다. 친구들하고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냇가 둑에서 놀다 참외서리를 하러 갈 때와는 다른 흥분이 몰려왔습니다. 

​영화에서 보던 룸살롱의 아름다운 여자들, 깡패들, 맥주며 안주를 나르는 웨이터들의 모습이 사진처럼 머릿속에서 스쳐갔습니다. 진옥이 형이 밤이 늦도록 룸살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해줄 것을 생각하니까 저절로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멀리 원두막에 켜 놓은 호야불이 보였습니다. 진옥이 형이 모깃불을 피우는지 호야불빛에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진옥이 형은 우리보다는 소주병을 보고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며 반겼습니다. 원두막에 앉으니까 시원했습니다. 한쪽 기둥에는 파란색의 모기장이 걸려있고, 이엉 밑의 서까래에는 수건이며, 옷 같은 것이 줄에 묶여 걸려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깃불 연기에 눈이 매웠지만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낭만이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가끔 산에서 부엉이는 부엉부엉, 소쩍새는 소쩍소쩍 울기도 하고, 참외밭 옆의 논에서 개구리들이 요란하게 합창을 하기도 했습니다.

진옥이 형 집 근처에 사는 친구가 소주병 뚜껑을 따고 나서야 잔도 없고 안주도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잔은 물주전자 뚜껑에 엎어져 있던 탕기로 대체가 됐지만 안주가 문제였습니다. 진옥이 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일제히 참외밭을 바라봤습니다. 

호야불빛이 비치는 곳에 노랗게 익은 참외들이 드문드문 보였습니다. 참외로 안주를 하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진옥이 형 임무가 참외밭 지킴이입니다. 말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진옥이 형이 원두막에서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진옥이 형이 잘 익은 참외 몇 개를 따 올 줄 알았습니다. 
“참외 익은 것은 방 씨 아저씨가 몇 개인지 다 세어 보고 가서 말야…”
진옥이 형은 덜 익은 참외를 그것도 달랑 한 개만 따 갖고 원두막에 올라왔습니다. 참외가 덜 익으면 오이보다 맛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네 명, 안주는 덜 익은 참외 한 개, 소주는 4홉들이 두 병, 소주잔은 지금의 밥그릇 크기와 비슷한 탕기로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호야불이 전등불처럼 환하지 않아서 소주를 얼마나 따랐는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충 마시는 느낌으로 봐서 술잔이 돌아올 때마다 소주잔 두 잔 분량을 마셨던 것 같습니다. 

잔이 하나밖에 없는 형편이라 술잔을 놓고 이야기할 틈이 없습니다. 잔을 돌리면서 마시다 보니 금방 소주병이 비어 버렸습니다. 비가 온 다음 날 먹는 복숭아보다 맛이 없는 참외 안주는 맹탕이라 취기도 더 쉽게 올라왔습니다. 

술병이 비었으니 진옥이 형의 룸살롱 경험담을 들을 차례입니다. 진옥이 형은 기둥에 걸어 두었던 옷에서 담배부터 꺼냈습니다. 담뱃불을 붙이고 나서 룸살롱 이야기는 하지 않고, 사람이 네 명인데 겨우 4홉들이 2개를 사왔냐? 너희들은 양심도 없냐? 내가 명색이 룸살롱 웨이터 아니었냐? 나 혼자도 4홉들이 한 병 정도는 나팔을 분다. 그러니 얼른 가서 4홉 들이 두 병만 더 사 와라! 하며 술타령만 했습니다.

돈이 없다는 친구의 말에 진옥이 형이  바지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며 새우깡도 한 봉 사오라고 말했습니다. 친구가 얼른 돈을 받아서 원두막을 내려갔습니다. 남은 친구와 저는 아스라하게 취기가 오르는 것을 느끼며 진옥이 형이 말 꺼내기만 기다렸습니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 줄까?”
“예. 빨리 해 주세요.”
진옥이 형이 담배꽁초를 모깃불에 던지며 하는 말에 우리는 거의 동시에 엉덩이를 들썩이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야한 이야기 해 줄게.”

​진옥이 형의 말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습니다. 진옥이 형이 야하다는 수준은 남자와 여자의 섹스를 주제로 한 고금소총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친구는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킬킬! 거렸지만 전 이미 한 권짜리 고금소총을 독파한 뒤라서 하품만 나왔습니다. 그 시절에는 장날마다 난전을 펴고 책을 파는 장사꾼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춘향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고금소총, 천자문, 명심보감 같은 책을 팔았습니다. 

룸살롱 스토리는 물 건너갔고, 진옥이 형한테 집중적으로 술을 따라 준 후에 참외나 따먹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무렵 술과 새우깡이 왔습니다.

우리는 다시 탕기에 소주를 따라 돌리기 시작했고, 안주를 아껴 먹으라는 진옥이 형 말에 술잔을 비우고 새우깡 한 개씩을 먹었습니다. 그 덕분에 그날 밤 잘 익은 참외는 맛도 못 봤습니다. 이튿날 참외밭 주인이 와서 "학교 안 갈 겨?" 하고 고함 치는 바람에 부스스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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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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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211.XXX.XXX.87)
사람냄새나는 글 잘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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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7 08:15:42
0 0
만수 (121.XXX.XXX.211)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추억을 들춰보는 시간이 늘어가는 것과 비례하는 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23-08-30 15: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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