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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나와 종, 그리고 고먼의 시
허찬국 2023년 08월 02일 (수) 00:00:24

미국에서 한창인 ‘문화전쟁(cultural war)’을 우리나라에서 쉽게 설명하는 게 어렵습니다. 대개 ‘보수’가 ‘진보’를 공격하며 쓰는 ‘woke’가 대표적 전쟁 구호이죠. 미국의 논객들에 따르면 공화당이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이 전쟁의 주요 내용은 ‘역사적 인종차별,‘ ’성적 정체성·취향 다양성,’ 그리고 ‘여성의 임신 결정권‘ 등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후자 두 가지는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이슈인데, 노예제도-인종문제는 우리 사회가 겪어본 일이 아니기에 추상적으로 인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전쟁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작은 트럼프라 불리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드산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이 전쟁의 최선두에 있습니다. 플로리다 마이애미 인근 학군의 교육당국의 올 5월 결정이 이런 문화 전쟁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줍니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감동적인 자작시 ‘The Hill We Climb“을 낭송한 것을 계기로 젊은 시인 아만다 고먼은 널리 알려졌지요(2019.1.19. 임종건, 자유칼럼 '미국을 흔든 아만다 고먼의 시(詩)'). 마이애미 학군은 이 시를 초등학교 교과과정에서 뺏습니다. 인종 문제에 대한 언급 때문인지, 불편하다는 학부모들의 불평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먼은 이런 결정이 충격적이라고 반응했습니다. 

아만다 고먼이 7월 15일 뉴욕타임스에 '아직도 수중에 있는 이들을 기억하며(In Memory of Those Still in the Water)' 에세이를 실었습니다. 필자가 지난달 자유칼럼(2023.7.3. '끊이지 않는 지중해의 조종(弔鐘)')에서 다루었던 아드리아나호 침몰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내용이며 애도시(哀悼詩)도 실었습니다. 고먼은 밀항선에 짐짝처럼 실려 그리스 연안 지중해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은 600명이 넘는 승선자들의 처지가 1781년 대서양을 건너던 영국의 노예선 종(Zong)호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130명가량의 노예로 팔려가던 아프리카 사람(이하 노예)들과 비슷하다고 지적합니다. 고먼의 애도시는 종호 사건의 재판기록문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모아 구성된 것입니다. 

종호 학살

18세기 당시 캐리비언해의 자메이카 등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를 대량재배해 생산한 설탕을 유럽에서 비싸게 팔아서 영국은 큰 경제적 이득을 챙겼습니다. 영국에서 출발한 선박은 아프리카에 들러 사탕수수 농장에서 필요한 아프리카인 노예들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 사탕수수 재배지로 나른 후, 설탕을 싣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3각 무역이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위키백과가 소개하는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영국 리버풀 소재 그레그슨(Gregson) 노예중계상 소유의 선박 종호는 1781년 8월 아프리카 가나에서 선적 용량의 두 배 규모인 400명이 넘는 노예를 싣고 자메이카로 항해하던 도중 아이와 여자를 포함 130명이 넘는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배의 승무원들은 항해가 길어져 물이 떨어지자 아프리카인들을 배 밖으로 던졌다고 증언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살인이 아니라 보험금이었습니다. 자메이카에 도착한 후 선주들은 살해한 아프리카인 노예들로 인한 손실에 대한 보험금 지급을 신청합니다. 당시 관행은 노예는 화물과 마찬가지로 운송보험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항해 중 발생한 ‘자연사’에 대한 보상은 없으나 일반 화물처럼 손상, 손실되는 경우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이것이 선원들이 노예들을 배 밖으로 던져 학살한 중요한 이유였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 ‘종 호 학살’ 참조)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자 선주들은 소송을 합니다. 1차 재판에서는 배심원단이 선주들의 편을 들어주었으나, 상고심에서는 종호 선장과 선원들의 실책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증거를 바탕으로 보험사가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하지요. 이 학살 사건의 전모가 알려지기 시작하자 노예거래를 반대하는 운동이 힘을 얻으며 확산됩니다. 영국 의회는 그 이후 점차 노예거래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1807년에는 노예거래법(Slave Trade Act)을 통과시켜 영국이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드디어 1833년에는 노예제도폐지법(Slavery Abolition Act)을 제정해 대영제국 대부분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합니다

재판기록문과 고먼의 시

1783년 있었던 상고심 재판기록문(Gregson v. Gilbert)의 단어들을 그대로 사용하여 시를 지은 것은 고먼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녀의 에세이는 한 캐나다 시인(NourbeSe Philip)이 재판기록에 나오는 단어로 구성한 장편의 연작시 ‘ZONG!’(2008년)을 소개합니다. 고먼도 똑같은 방식으로 재판기록문에서 발췌한 글자로 아드리아나호 희생자들을 위한 시를 썼습니다.

필자의 문학적 소양이 모자라 고먼의 추모시(These Means of Dying)를 제대로 번역할 엄두가 나지 않아 본문의 앞부분만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그리고 시어들의 원천인 재판기록문 첫 부분을 소개합니다. 이 요약문에 나오는 단어와 문장도 고먼의 시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 부분은 밑줄을 쳤습니다. 밑줄 친 단어들을 연결하면 시의 첫 줄 “May the took here Rest”가 됩니다. 원문에서 5월인 'May'가 시에서는 소망을 나타내는 조동사로 쓰이죠. 마지막 단어 'Rest도 원문과 시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 구절은 “죽은 이들이 편히 쉬시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요. 

      
 


(이하 생략).

“Gregson v. Gilbert(a). Thursday 22d May 1783. Where the captain of a slave-ship mistook HispanioIa for Jamaica, whereby the voyage being retarded, and the water falling short, several of the slaves died for want of water, and others were thrown overboard, it was held that these facts did not support a statement in the declaration, that by the perils of the seas, and contrary winds and currents, the ship was retarded in her voyage, and by reason thereof so much of the water on board was spent, that some of the negroes died for want of sustenance, and others were thrown overboard for the preservation of the rest.“

(이하 생략). 

에필로그

종호 학살 때 50명이 넘는 여성과 아이들이 먼저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아드리아나호에 탔던 여성과 어린이가 모두 익사한 것과 닮았지요. 다양한 유사점을 생각하면 고먼이 아드리아나호의 비극적 소식을 듣고 종호 학살을 떠올린 게 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 미국 문화전쟁에서 반(反)woke 보수, 그리고 트럼프, 드산티스 지지자들은 고먼을 교육과정에서 퇴출하고, 종호 학살과 같은 부정적 과거사는 꺼내지도 말라는 입장입니다. 보수 성향의 우리나라 사람들 중 문화전쟁의 전후 사정을 잘 몰라도 정서적으로 미국 ‘보수’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어 보입니다. 수고스러워도 사정을 더 아는 게 필요합니다.

미국의 문화전쟁에서 전적으로 진보의 입장을 지지하는 필자가 느끼는 우리의 ‘진보’와 미국 ‘진보’와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어제 일처럼 거품을 물지만, 기괴한 왕조(王朝)를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인 북한에서 현재진행형인 인권유린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피부색과 무관한 것처럼, 한반도 남쪽에서 인권이 중요하면 북쪽에서도 중요합니다. 이와 관련된 한국 ‘진보’의 입장은 미국 ‘보수’의 위선적이고 선택적인 기억상실증과 차이가 없습니다. 

고먼은 에세이를 다음처럼 마무리합니다. “비가(悲歌)의 목적은 죽은 이를 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또 살아있는 사람을 감동시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도록 촉구하는 기회라 생각한다. 난파선의 잔해를 하나하나 살피며, 거기에서 우리 자신의 일부를 찾는 기회라 생각한다.” 

주: 그레그슨 v. 길버트 재판기록문 링크와 번역
http://www.commonlii.org/uk/cases/EngR/1783/85.pdf

“그레그슨 v. 길버트(a). 1783년 5월 22일. 노예선의 선장이 히스파니올라를 자메이카인 줄 잘못 알면서 항해가 더 지연되며 물이 떨어져 어떤 노예들은 목말라 죽고, 다른 노예들은 배 밖으로 던져졌는데, 이런 사실들은 원고 측의 사건 진술서에서 바다의 자연적 조건으로 인한 반대로 흐르는 조류와 바람 때문에 항해가 지연되어 물이 떨어졌고, 흑인들 일부는 갈증과 기아로 죽고, 또 다른 일부는 나머지를 살리기 위해 배 밖으로 던져져 죽었다고 하는 내용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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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210.XXX.XXX.161)
한국의 진보가 외면하는 것이 북한의 인권만도 아니죠. 함경도 길주라면 숲이 우거지고 산세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일부죠. 남북 통일되어도 그곳 근처에 갈 사람이 있을까요? 핵보유국들이 동토지대나 외딴섬 사막지대에서 핵실험을 한 이유가 뭐겠어요? 그나마 지금은 어느나라도 하지 않잖아요? 이런 천혜의 관광지에서 핵실험한 것을 규탄 한 번 한적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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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2 11:4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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