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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을 닮은 피천득
노경아 2023년 05월 24일 (수) 00:00:17

연한 초록이 진한 초록을 누르는 계절입니다. 이맘때 시골길을 느리게 걷다 보면 물가에서 시작한 연록이 산허리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산 정상에선 진초록보다 연록이 더 도드라진 빛을 내뿜으며 단연 주인공입니다. 

금아(琴兒) 피천득의 ‘오월’을 다시 읽습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로 시작하는, 시보다 아름다운 수필입니다. (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오월이면 칼럼 등 많은 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장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게 오월은 생명의 계절로 다가옵니다. 힐끗 가벼이 봐 넘기던 푸름이 매 순간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말라 죽은 줄만 알았던 나무의 앙상한 가지마다 연록의 잎이 반짝일 때면 오십대 중반의 내 나이에 새삼스레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피천득의 ‘오월’은 이렇게 이어지나 봅니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피천득, 그 이름만으로도 오월이 봄이 첫사랑이 ‘쉘부르’(Cherbourg·셰르부르가 바른 표기·프랑스의 항구 도시)가 떠오릅니다. 특히 나처럼 교과서에서 ‘인연’을 배운 세대에게 피천득은 고교 시절의 아련한 추억일 수 있습니다. 

국어시간이 끝난 후 아사코인 양 우산을 쓰고 비좁은 책상 사이를 걸어 다니던 친구들이 보고 싶습니다. 고운 연두색 우산 대신 살이 부러지고 낡은 검정색 우산을 썼지만 아사코만큼, 아니 그보다 더 예쁘고 순수한 여고생들이었죠. 지금도 고등학교 국어책에 ‘인연’이 실려 있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책이 귀하던 시절, 글을 읽고 쓰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건 단연 피천득 작품들입니다. 국어선생님이 담임인 덕에 ‘인연’뿐만 아니라 시, 번역 소설 등 피천득 작품 속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로버트 리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아직도 가슴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어린 마음에 피천득처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영문학자가 쓴 글인데도 번역 문투가 전혀 보이지 않아 더더욱 빛나는 작품들입니다. 소박하고 맑은 문장들로 삶의 지혜를 가르쳐준 ‘플루트 연주자’ 등 그의 작품들은 산골 여고생들에게 문학의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수필은 청자연적(靑瓷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피천득이 정의한 수필입니다. 그와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시인 이해인은 “산호와 진주로 상징되는 글과 장미 향 가득한 삶 자체로 아름다운 러브레터였다”고 피천득(그의 글)을 추앙했습니다. 

5월에 태어나 5월에 떠난 피천득. 내일(25일)은 그가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저세상으로 간 날입니다.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오월도 그를 따라 떠나가고 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과 이별하려니 서운하기 짝이 없습니다. 맑고 단아한 피천득의 삶을 되돌아보며 소중한 인연들을 잘 이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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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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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용 (220.XXX.XXX.57)
피천득이 떠나는날(25일)에 저는 우즈베키스탄으로 3박4일 일정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선생님께서는 원래 문학을 공부하셨군요?
역시 글쓰는 솜씨가 ㅎㅎ
Column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건강한 모습으로 행복한 시간 보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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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4 09: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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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 (116.XXX.XXX.129)
그곳 날씨가 좀 덥긴 하나 화창하다고 하니 즐겁게 다녀오세요.
저는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읽는 걸 무척 좋아했는데, 지금은 노안으로 전철이나 버스에선 읽을 수 없어 많이 아쉽습니다.
이번 한 주도 대표님께선 행복하게 보내시겠네요. 여행 기간 건강 잘 챙기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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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4 1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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