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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중이 삼촌
한만수 2023년 05월 04일 (목) 00:00:37

예전에는 길을 가다 산골 마을이나, 동네에서 외떨어진 산비탈 마을 같은 것을 보면 저런 데서 어떻게 사람이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나서는 그런 편견은 줄어들었지만,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새삼스럽게 놀랄 때가 많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는 ‘고자리’라는 동네가 있는데 20리를 걸어 나와도 큰길이 보이지 않고 ‘고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동네입니다. ‘노루목’은 좁은 길을 한참이나 들어가야 동네가 나오는 지역 이름입니다. 무당이 살던 동네는 ‘당골’, 묘지가 많은 동네는 ‘비석 골’ 숲이 깊어 어두운 골짜기는 ‘어둠 골’, 선돌이 있던 동네는 ‘선들’ 등 어느 지역을 가나 동네 이름이 비슷비슷합니다.

동네 이름만 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동네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도 비슷합니다.  술만 마셨다 하면 술주정하는 주정꾼들이 한두 명은 있고, 어떤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자식들만큼은 공부시켜야 한다며 자식 공부(농사)에 집중하는 가장이 있는가 하면, 일찌감치 대처로 나가서 명절 때면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 자식이 있는 집. 일 년 내내 집안에서 환자가 떠나지 않는 집이 있기도 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지독한 구두쇠도 있고, 온 동네 소문은 죄다 옮기고 다니는 수다쟁이도 있습니다.

요즘에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동네마다 한두 명씩은 그 시절 말로 반편이라 부르는 지적장애인이 있습니다. 소아마비를 앓거나, 앉은뱅이들이 있는 동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지적장애인들은 생전에는 아이들의 놀림감이나, 어른들의 심부름꾼으로 지내다 언젠가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수가 많습니다. 정상인들보다 오래 살지 못하는 데다, 죽어도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드뭅니다.

철중이라는 친구 삼촌도 언제부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니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적장애가 있는데다 소아마비를 앓은 철중이 삼촌은 한쪽 다리가 짧습니다. 지게를 지고 가는 뒷모습을 보면 지게에 얹은 바지게가 파도를 타는 것처럼 위태롭게 양쪽으로 출렁거립니다. 

철중이네는 철중이 아버지가 워낙 부지런하고 근면해서 땅도 제법 가지고 있습니다. 소도 기르고 있어서 여름에 냇가나 들판에 가다 보면 철중이 삼촌이 꼴을 베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도 비를 맞으면서 꼴을 잔뜩 베어 지고 가기도 합니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집에서 놀지 않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장터를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철중이 삼촌은 다리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키도 작고 말수도 없었습니다. 길을 가다 지게를 지고 가는 철중이 삼촌을 만나서 인사를 하면 그냥 씩 웃고 맙니다. 하루는 궁금해서 철중이에게 삼촌이 말을 못 하시냐고 물었습니다. 

“말을 더듬어서 말하기를 싫어하셔.”
철중이 말로는 평소에도 꼭 필요한 말, 이를테면 "담배가 떨어졌다.", "새참 올 때가 안 됐냐?". "그만 잘란다."라는 정도만 말을 한다고 합니다. 말을 더듬고 다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일을 서툴게 하거나, 엉뚱한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철중이네 집안일은 철중이 삼촌 혼자 다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대개 작은 설날이나 추석날은 나무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철중이 삼촌은 집마다 명절 준비에 바쁜 날도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씩 해 옵니다. 작은 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나뭇짐을 지고 가는 모습을 보면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시선이 마주치면 씩 웃으며 부지런히 걷습니다. 

만약 요즘에 소처럼 일을 하면 이웃들이니 만류를 했을 겁니다. 심하면 장애인 학대죄로 관계 기관에 신고하는 이웃도 있었을 겁니다. 

그 시절에는 어렸을 때부터 날만 새면 일을 하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비를 흠뻑 맞으면서 지게를 지고 가는 모습을 봐도 뭐라고 하는 이웃들이 없었습니다. 그냥 철중이 삼촌은 겨울이든 한여름이든 죽어라 일만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습니다. 

이웃들이나 철중이 삼촌을 알고 있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철중이네 가족들도 가족의 한 명인 철중이 삼촌을 머슴처럼 부려 먹고 있었습니다. 더 놀란 것은 철중이 삼촌이 가족들과 같은 상에서 밥을 먹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철중이네 집에 갔습니다. 점심때가 지났는데 철중이네는 안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상에 둘러앉아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철중이 삼촌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외양간과 딸린 바깥채 쪽을 바라봤습니다. 

방안에서는 철중이 삼촌이 배가 몹시 고팠던지 허겁지겁 밥을 퍼먹느라 마당에 서 있는 저한테 시선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는 별 생각 없이 밥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철중이가 사용하는 뒷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철중이가 밥을 먹고 있는 동안 다른 친구가 왔습니다. 둘이 방에 눕거나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철중이 삼촌이 혼자 밥 먹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야! 철중이 아버지 술만 드시면 나 아니면, 내 동생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얼마나 자랑하시는데…”

​친구 말은 어린 제 마음에도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만약 철중이 삼촌처럼 부지런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머슴을 구하려면 새경으로 쌀 몇 석은 줘야 될 겁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평소 철중이가 삼촌을 살뜰히 챙겨준다는 점입니다. 

철중이 방에서 우리끼리 몰래 막걸리나 소주를 마실 때는 꼭 삼촌 몫을 챙겨서 가족들 모르게 갖다주기도 하고, 장터에서 군청의 공보실 영화를 상영할 때는 돗자리를 말아 들고 삼촌하고 같이 나오는 모습도 종종 봤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각자 자기 삶을 사느라 명절 때나 한 번씩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됐습니다. 문득 철중이 삼촌이 생각나서 “지금도 건강하냐?”고 고향을 지키는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 양반이야 세상에 뭔 걱정 있나? 잘 있겠지…아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친구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내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철중이 삼촌 죽음을 알려줬습니다. 친구의 삼촌이니까 장례를 치렀다면 기억이 선명했을 겁니다. 장례도 치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비 오는 날 허겁지겁 밥을 먹던 철중이 삼촌 얼굴이 쓸쓸하게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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