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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대한 단상
김창식 2023년 03월 10일 (금) 00:00:53

지인으로부터 사과를 선물받았습니다. 어디 고랭지 사과라는데 크지 않으면서도 맛이 일품이었어요. 보낸 이의 정성이 담겨서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요즘은 애플망고, 샤인머스캣처럼 이름도 낯선 과일들이 소개돼 특히 젊은 세대의 마음을 훔치고 있지만 사과는 예로부터 시그니처 과일이었죠. 차례 상에 빠지지 않는 전통 과일의 순서를 매기자면 사과, 배, 감... 

마트에 가보면 별의별 사과가 자태를 뽐냅니다. 예전엔 홍로, 부사, 국광, 홍옥, 감홍, 아오리 같은 사과가 입에 오르내렸지만 이제 한물간 분류예요. 요즘은 산지와 품종, 재배 방식에 따라 종류가 다양합니다. 충주사과, 얼음골사과, 영주별사과, 청송사과, 고랭지사과, 시나노골드사과... 정체 모를 엔비사과라는 품종도 있습니다. 인문학적 시각에서 보면 사과는 인류사적으로도 특별한 함의를 가진 과일이에요.

우선 성경에 나오는 저 유명한 실낙원(失樂園) 서사의 상징물인 ‘선악과(善惡果)’입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에덴동산에 데려가 절대 먹지 못하게 금하였다는 선악과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 사과가 아니고 무화과, 포도, 살구, 바나나나 오렌지라는 설도 있지만, 유럽(가톨릭을 포함한 서방 교회)에서는 보통 사과로 해석하며, 이 같은 관습과 전통이 유력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엔 고대 그리스로 가볼까요? ‘아프로디테의 황금사과’입니다. 신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성질을 견디지 못해 던진 황금사과 때문에 서로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싸운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이상 세 여신의 이야기는 잘 아실 거예요. 어쩌다 판정을 맡게 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건넵니다. 그 일로 인해 장장 10년여 계속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게 되죠. 결과 트로이는 멸망하고 귀국길에 오른 그리스군 연합 함대 또한 난파합니다.

사과는 문학의 모티프로도 영항력을 발휘하는군요. ‘<빌헬름 텔>의 사과’입니다. 실러의 희곡에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맞혀야 살아남는 기구한 운명을 지닌 주인공 궁사(弓師)의 이야기가 나오죠. 어릴 적 그 이야기를 들으며 윌리엄 텔(빌헬름 텔)이 인류를 구한 영웅(지금의 마블이나 DC 히어로?)인 줄 여겼는데 나중 알고보니 그냥 촌구석에 사는 평범한 아저씨였더라고요. ‘<백설공주>에 나오는 독사과’는 또 어떻고요? 동화 속에서 공주가 아니라 계모 왕비가 사과를 먹었더라면 이야기가 더욱 재미있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사과는 미술의 중요한 오브제이기도 했지요. 우선 ‘세잔의 사과’입니다. 어릴 적 서양 예술가들 중 밀레가 최고인 줄 알았어요. 교과서에 밀레의 그림 <만종(晩鐘)>과 <이삭줍기>가 나왔거든요. 밀레도 물론 훌륭한 화가지만 근, 현대 미술의 새로운 장을 연 화가로 평가 받는 화가는 세잔입니다. 세잔이 그린 그림 <사과와 오렌지>를 보면 한 화면 안에 위, 아래, 옆 등 다양한 시점이 존재하는군요. 한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을 원근법에 따라 그리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이처럼 복수 시점을 동원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친근한 사물을 낯설게 배치해 당혹감을 안기는 ‘데페이즈망(Depeysement)’ 기법으로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사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작품 <리스닝 룸>을 보면 방에 사과가 꽉 차 있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허무는군요. 중절모를 쓴 신사의 얼굴(눈, 코, 입, 표정)을 온통 사과가 가리고 있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작품도 독특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우리 또한 천 조각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대면의 삶을 살고 있지만요.

과학과 문명, 문화 창달 분야에서 사과의 역할은 한층 두드러집니다. 우선 ‘뉴턴의 사과’입니다. 고향집 사과나무 아래 앉아 명상(멍때리기?)을 하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바로 그 사과입니다. 그처럼 대단한 법칙의 구체화는 그때까지 쌓인 지식이 축적된 결과라며 일화를 의심하는 시각도 있지만, 중력이 작용해 떨어진 사과가 영감의 계기가 되었다는 가설에 ‘당근(사과 아님!)’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의 아버지로 일컫는 컴퓨터 과학자 ‘튜링의 사과’입니다. 앨런 튜링은 동성애자로 알려져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고 범죄자 취급을 받는 등 망가진 삶을 살다 청산가리를 넣은 사과를 깨물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대 디지털 문명의 새 장을 연 스티브 잡스의 애플사 로고가 바로 튜링이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형상화했다는 주장도 있더군요. 위에서 살펴본 흐름처럼 그러려니 지나쳐온 평범한 사과가 고비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꾼 셈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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