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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순 사장님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함인희 2023년 02월 22일 (수) 00:01:08

블루베리 밭은 요즘 가지치기가 한창입니다. 블루베리 나무는 천근성(淺性)이라,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기보다 지표면 20~30cm 정도 아래서 뿌리를 벋는다고 하네요. 매해 이맘때면 수세가 좋은 블루베리 나무에선 새 가지가 부쩍부쩍 올라옵니다. 그중 제법 굵게 올라오는 가지들을 받아 키우고, 가늘게 올라오거나 나무 한가운데서 올라오는 가지는 눈물을 머금고 쳐냅니다.

“물관리만 잘해도 농사는 90% 먹고 들어가는겨.” 이 말을 농사 시작 이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습니다. 한데 블루베리 나무는 물을 아주 좋아하면서도 습한 땅은 매우 싫어하기에 물관리가 까다로운 편입니다. 물에 예민한 블루베리 비위 맞추느라 저희 농장에도 날마다 물을 주는 점적관수(點滴灌水, drip irrigation) 시설을 해 놓았습지요.

12년 전, 블루베리 묘목을 심으면서 점적관수 시설을 할 때 점순 사장님과 안면을 트게 되었습니다. 점순 사장님네 농자재점은 번암 사거리 목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는데요, 그곳에 가면 크고 작은 물탱크부터 온갖 굵기의 고무관, 색깔과 재료도 다양한 호스, 이름 외우기도 벅찰 만큼 다채로운 종류의 부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점순 사장님이 10톤짜리 물탱크를 트럭에 싣고 와서 직접 저희 농장에 부려놓던 그날부터, 저는 점순 사장님의 찐팬이 되었습니다. 서울 촌놈이었던 제 눈에, 농자재에 관한 한 만능박사였던 점순 사장님의 일솜씨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경이로웠습니다. ‘여자가 못할 일이 어디 있어’ 머릿속으로만 맴돌던 생각이 ‘웬만한 남자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일 잘하는 여자’를 눈앞에서 보자니, 감동이 밀려올 정도였답니다. 

점적관수 시설은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지만, 굵은 관에 작은 호스들을 이어 붙여야 하고, 호스에 일일이 구멍을 뚫은 후 단추를 달고 블루베리에 물이 들어가도록 연결해주어야 합니다. 단추는 물의 양을 조절하는 기능을 해주는데 초록색 단추는 시간당 8리터, 회색 단추는 4리터, 붉은색 단추는 2리터 들어가는 식입니다.

점순 사장님은 그 많은 정보를 어떻게 입력해 놓았는지, 척하면 척, 요술램프에서 나온 지니처럼 도움을 요청하면 즉시 해결해주었습니다. 거의 10년을 점순 사장님 신세를 톡톡히 졌는데, 그만 코로나 위기가 시작될 즈음 사장님 농자재점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코로나 때문은 아니었구요, 세종시에서 청주공항으로 이어지는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점순 사장님네 터가 수용되었기 때문이었답니다. 점순 사장님네는 500평 넘는 규모에다 번암 사거리에서 청주 방향으로 가는 도로변에 있었기에, ‘보상액이 엄청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지요. 

농자재점이 곧 문을 닫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던 날, 점순 사장님은 마침 한산한 틈을 타 “커피 믹스나 한잔 하고 가시라”며 제 팔을 붙잡더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더라구요. 남편과는 사별했는데 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아빠를 떠나보낸 딸이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남편 간 지도 세월이 꽤 흘렀다며 쓸쓸히 웃음 짓더라구요.

한데 점순 사장님 남편이 ‘인물 하나는 끝내주었답니다.’ 선을 보러 간 자리에서 남편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 남자 나 혼자 차지하기는 글렀구먼’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렇게 잘난 남자 혼자 차지하려는 건 욕심이지, 그것도 과한 욕심이야.’ 싶었다네요. 아니나 다를까 결혼 후 남편은 ‘열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많은 여자의 남편 노릇’을 했더랍니다. 

결혼 후에도 농자재점 운영은 오롯이 점순 사장님 몫이었는데, 단골손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조치원 돈을 긁어모으는구먼. 그 돈 죽기 전에 워찌 다 쓰고 가려나” 놀릴 만큼 잘 굴러간 덕분에, 돈 버는 재미 하나로 족하다 생각하며 살아냈답니다. 남편 재미는 어차피 내 몫이 아니었으니 서운할 것도 서러울 일도 없었다네요. 

남편이 무슨 병으로 떠났는지는 비밀로 하던 점순 사장님, 남편 죽고 혼자되고 나니 꼭 한 가지 불편한 일이 생겼답니다. ‘이놈 저놈 와서 집적대는 통’에 귀찮고 성가시다 투덜댔더니, 큰시누이가 "남편은 교도소에 들어가 앉아 있더라도 울타리가 되어준다."며 등짝을 한 대 두드리더랍니다.

10톤짜리 물탱크 정도는 가볍게 부리는 천하장사에, 아무리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무안하지 않게 흔쾌히 가르쳐주던 점순 사장님. 호탕한 웃음을 뒤로하고 홀연히 떠난 이후 그 누구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데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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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달식 (175.XXX.XXX.133)
淺近性>>>淺根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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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2 12:08:29
0 0
103227 (221.XXX.XXX.151)
감사합니다.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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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3 23:29:15
0 0
한만수 (121.XXX.XXX.211)
점순 사장님 밤마다 울었을 것 같습니다. 원래 잘 웃는 분이 눈물이 많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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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2 08:46:14
0 0
103227 (221.XXX.XXX.151)
정말 그럴 것 같아요.
점순 사장님은 호탕하게 웃기도 잘 했지만
눈물 또한 많은 분일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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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3 23:32:1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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