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에 천민자본주의로 매도당하던 시장경제는 사회안전망을 갖추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거듭났습니다. 구소련이 몰락하면서 사회주의는 세력을 크게 잃었으나 사회안전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국가가 아예 국민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라는 말을 듣고 자란 세대에게는 상전벽해의 변화이지요. 최근의 인기 드라마는 “마름이 등 따시고 배부르면 지가 주인인 줄 안다”라는 재벌 회장의 고약한 말을 퍼뜨렸습니다. 부리는 사람을 너무 풀어주면 말을 안 들으니 항상 적당히 조여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머리는 냉철한 분석을 원하는데 가슴에는 정곡을 찌르는 촌철(寸鐵)이 더 잘 와닿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은 맬서스가 설파한 인구론이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인구는 느는 듯 마는 듯하였고 사람들은 절대빈곤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농사 기술의 발전이 없지는 않았으나 식량 생산은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했고 매년 수확한 식량으로 먹고살 만큼만 살아남았습니다. 소위 맬서스의 저주가 목을 죄어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하는’ 시절이었지요. 영국이 빈곤층 지원을 늘리도록 ‘구빈법(poor law)’을 고치자는 안을 논의할 때 반대파는 열심히 일한 사람도 굶어 죽는 판에 제 앞가림도 못 하는 빈곤층 지원 확대는 가당찮다고 나섰습니다. 이들이 맬서스 인구론을 내세운 탓에 맬서스는 완고한 보수의 원조가 되었지요.

그 시절 ‘나라’의 일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치안을 유지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정도였습니다. ‘나랏님’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그 비용을 대고 호식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력 기반도 다집니다. 적게 거두면 성군이고 많이 거두면 폭군이지요. 관리가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다산(茶山) 선생에 따르면 목민(牧民)인데 어쩐지 목축(牧畜)을 연상시킵니다. 가축은 잘 먹이고 길러야 도축하더라도 마리의 수가 늘어나지요. 목민도 세금을 거두되 담세능력은 키우도록 백성을 잘 먹여야 한다는 뜻 아닐까요?

목민의 시대에 백성은 군주의 통치에 복종하고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도 구하지 못하는 가난’에 짓눌렸으니 스스로 자유와 민권을 주장할 힘도 없지요. 죽이고 빼앗을 수는 있어도 같이 나눌 것은 없는 시대에 사회주의는커녕 사회복지도 어림없습니다. 폭정이 길어져서 반란이 일어나도 힘없는 백성은 성군이나 기다릴 뿐입니다. ‘동학란’이 성공했어도 결국 왕조 교체로 끝났겠지요. 

그런데 진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혁명이 노동생산성을 급격히 개선하면서 1820년부터 인구가 1인당 GDP와 함께 빠른 속도로 늘기 시작합니다. 인구만 느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등 따시고 배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요.

시민혁명은 1776년 미국 독립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시작했으나 우여곡절을 겪다가 184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구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同時多發)하여 성공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민권도 서구 사상계를 주도하는 탄탄한 주류로 부상합니다. 경제학자의 눈으로는 유럽인 대다수가 ‘등 따시고 배부른’ 삶을 시작한 이후에 비로소 자유와 민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시민혁명은 폭군을 몰아내고 성군을 모시는 왕조 교체에 그치지 않고 시민이 통제하는 정부를 세웁니다. 자유와 민권은 목민의 대상이던 백성이 주인으로 나서면서 얻는 당연한 전리품이겠습니다.

“마름이 등 따시고 배부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아웅산 테러로 타계한 고 김재익 경제수석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1980년대 초반 민주화 운동은 시민들의 심정적 공감은 얻었으나 적극적 호응은 얻지 못했지요. 운동권 학생들은 교수들의 방관 때문이라며 분개하였습니다. NL(민족해방파)은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북한이 민주화 투쟁에서 중요한 동맹일 수 있다는 기대 속에 출현했습니다. 뒤숭숭하던 그즈음 김재익 수석을 만났습니다. 친한 운동권 교수가 ‘학살 정권’에 참여했다고 비난하자 경제학 교수의 생각은 다를 거라며 그가 몇 사람을 부른 자리였지요.

그는 처자식 먹여 살리기에 바쁜 가장들의 관심을 민주화로 돌리려면 민생이 그만큼 여유로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정부에서 일하는 자신은 그런 측면에서 민주화 선언에 서명하는 친구보다 실질적으로 더 민주화에 기여한다는 말도 했지요. 자기변명으로 들리기 딱 좋았지만, 진지한 언변에 군더더기가 없고 매우 조리 정연하다고 느꼈습니다. 그의 주장을 두고두고 되새겨 왔는데 이제 다시 생각하니 ‘등 따시고 배부른’ 나라의 백성이라야 주인 행세에 나선다는 말이었네요.

그의 지휘로 물가 상승률이 10% 아래로 안정되고 개방 기조가 정착하면서 경제의 성장세도 탄탄하게 이어졌지요. 결국 1987년 6월항쟁에는 전례 없이 넥타이 부대가 대거 시위에 참여하였고 그렇게 바라던 민주화도 급물살을 탔습니다. 시민혁명의 해 1848년은 산업혁명이 유럽인들의 삶을 개선하기 시작한 1820년에서 28년 뒤인데 우리의 6월 항쟁은 경제개발을 시작한 1962년부터 25년 뒤의 일이지요. 그 이후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고 감옥 가는 와중에서도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는 계속되었습니다. ‘등 따시고 배부른’ 주인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모범 사례지요. 그런데 산업화 없는 민주화는 성공해도 오래 못 갑니다. 백성이 주인으로 나서려면 먼저 ‘등 따시고 배부른’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백성이 주인만 되면 이상향일까요? ‘나랏님’이 없으니 폭군의 수탈도 없겠지요. 그러나 저마다 주인이니 서로 얼마나 다투겠습니까? 폭정 아래 삶이 유린당할 때 가련하고 선량하기만 하던 백성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 되면서부터 표변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착한 사람도 많지만 몰아낸 폭군보다 더 못된 인간도 많습니다. 이들이 주인 되어서 벌이는 다툼이 때로는 폭군의 횡포보다 더 파괴적이기도 합니다. 백성 모두가 함께 좋은 주인으로 행동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등 따시고 배부른’ 경험이 짧아 ‘주인 행세가 처음’인 우리는 미숙한 점이 많아 여러 가지를 배우는 중입니다. 삶 속에서 나라의 기적을 직접 겪고 보아 온 평생의 안목으로 보면 우리 백성은 곧 좋은 주인으로 진화해 갈 것입니다.

이승훈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바른사회운동연합 공동대표.
전기위원회 위원장, 녹색성장위원회 민간위원장, 한국가스공사 사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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