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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람 타고 훨훨, 박주가리 씨앗
박대문 2023년 02월 08일 (수) 00:00:08
   
  박주가리 열매와 은빛 솜털 씨앗. 박주가리과(科).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디맑은 겨울 하늘입니다. 산천에 눈이 쌓이고 영하권의 강추위가 이어지는 한겨울의 맑고 파란 하늘은 생각만 해도 온몸이 움츠러들 만큼 으스스하기까지 합니다. 차라리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오히려 푸근한 감이 드는데 한겨울의 쨍한, 파란 하늘은 조약돌을 던지면 와장창 깨져 내려앉을 것만 같은 호수의 살얼음처럼 섬찟한 떨림이 전해옵니다. 맑은 가을 하늘이 청량감을 준다면 파란 겨울 하늘은 으스스 떨리는 시린 감(感)이 듭니다.

푸른 겨울 하늘이 여느 계절보다 더욱 맑게 보이고 시리게 느껴지는 것은 공기 중의 습기도 얼어붙어 대기가 더욱더 투명하고 건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겨울에 산불이 났을 때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것도 공기 중에 습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건조한 겨울날 세찬 바람을 간절히 기다리는 식물이 있습니다. 앙상한 빈 가지에 매달려 있는 박주가리 열매 씨앗입니다. 겨울 찬바람이 몰아치고 공기 중의 습기가 얼어붙어 건조한 날이 계속되면 육질의 열매껍질을 가진 협과(莢果) 식물의 씨앗은 말라비틀어져 씨방이 두 줄로 갈라집니다. 갈라진 열매껍질, 즉 꼬투리가 벌어지면 그 안에 갇혀 있던 씨가 밖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콩 종류의 꼬투리가 대표적인데 박주가리 열매도 겨울이 되면 잘 말라 껍질이 두 쪽으로 갈라집니다. 

박주가리 열매 속에는 콩과(科) 식물과 달리 면사상(綿絲狀)의 털이 있는 종자, 하얀 명주실처럼 은빛 나는 솜털을 단 씨앗이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꼬투리가 벌어지면 그 안에 있는 씨앗과 씨앗에 붙어 있는 솜털이 바짝 마르고 부풀어 올라 겨울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새 삶의 터를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잘 마른 솜털을 단 씨앗은 바람 타고 날다가 언덕이나 초목에 걸려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쓸리다가 습한 곳이나 으슥한 곳에 닿으면 다가오는 새봄에 싹틔울 자리를 잡습니다. 

열매 속에 다닥다닥 붙은 박주가리 씨앗은 바람이 분다고 해도 민들레 씨앗처럼 한꺼번에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꼬투리에 켜켜이 쌓인 씨앗들은 먼저 떠난 씨앗이 붙어 있던 빈자리에 햇볕과 바람이 들면 다음 씨앗도 더욱 바짝 마르고 부풀어 올라 꼬투리에서 떨어져 날아갑니다. 남은 씨앗들도 같은 이치로 다음다음 비행 순서를 맞이하여 새길을 떠납니다. 바람이 불면 한꺼번에 우수수 날아가는 민들레 솜털 씨앗과 달리 박주가리 씨앗은 시차를 두고 순서에 따라 꼬투리를 떠납니다. 마치 둥지 속 새끼 새들이 성숙한 순서대로 하나씩 하나씩 둥지를 떠나 첫 비행을 하듯 순서에 따라 시차를 두고 새 삶터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는 사이 밤이 되거나 눈, 서리가 내리면 다시 햇볕과 세찬 바람에 말라 가벼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또 꼬투리를 떠나 훨훨 바람 타고 날아갑니다. 자연의 순환과 때를 알아 기다리고 맞춰서 꼬투리를 터뜨리고 순차적으로 멀리멀리 날아가는 박주가리의 번식 기술입니다. 

   
  벌어진 꼬투리 안에서 다음 비행 순서를 기다리는 박주가리 솜털 씨앗들  

박주가리는 우리나라 전역의 농촌이나 도시의 생울타리나 공원, 교외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덩굴식물입니다. 하천 둑이나 제방, 밭 언저리에서 잘 자랍니다. 이름의 유래와 그 기원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열매가 잘 마르면 껍질이 배(船) 모양처럼 두 쪽으로 갈라지는데 이 모습이 박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과 형상이 같아 ‘박 쪼가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설이 있습니다.

박주가리는 긴 줄기로 다른 식물체를 감고 오르며 자라는데 그 식물을 뒤덮어 햇볕을 가려 못살게 굴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식물입니다. 땅속줄기가 길게 벋어가고 여기서 싹이 난 덩굴이 길이 3m 정도로 자랍니다. 잎이나 줄기에 상처를 입으면 하얀 유액(乳液)이 나오는데 독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잎과 열매를 강장, 강정, 해독에 약용했다고 합니다. 

잎은 마주나고 긴 심장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잎끝은 뾰족하고 뒷면은 분록색입니다. 꽃은 7∼8월에 흰색이나 옅은 분홍색으로 피고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총상꽃차례에 달립니다. 화관은 넓은 종처럼 생기고 5개로 깊게 갈라지며 안쪽에 털이 빽빽이 납니다. 씨앗은 한쪽 끝에 명주실 같은 털이 있습니다. 이 털은 솜 대신 도장밥과 바늘쌈지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하는데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서 반으로 쪼개진 열매 속에서 면사상(綿絲狀) 털이 있는 종자가 바람에 날리는 것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은빛 털이 달린 씨앗은 이듬해 늦은 겨울까지 달려 있다가 새봄이 오기 전 건조한 날에 세찬 겨울바람 타고 훨훨 날아갑니다. 이에 연유해서인지 꽃말도 ‘먼 여행’입니다.

박주가리는 하수오와 잎과 꼬투리 모양이 매우 비슷합니다. 하지만 하수오는 마디풀과(科)에 속하며 꼬투리에 돌기가 없이 매끈한데 박주가리는 꼬투리에 돌기가 오돌토돌 나 있고 백미꽃, 큰조롱, 산해박 등과 함께 박주가리과(科)입니다.

눈 시리게 파란 겨울 하늘에 바람이 세차게 불면 삼라만상이 움츠러드는데 박주가리 씨앗은 오직 이런 날을 간절히 기다리다가 때를 맞춰 비로소 새 삶의 터를 찾는 비상의 날갯짓을 힘차게 펼칩니다. 자연 세상에는 나름대로 어떤 환경에서든 다들 그 환경에 맞춰 사는 지혜를 가진 것들만이 살아남습니다. 주어진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용하고 활용하여 살아갑니다. 황량한 겨울 벌판에서 바람에 날리는 박주가리 씨앗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지역에 엉겨 붙어 영역 다툼 없이 살도록 사방 멀리 후대를 퍼뜨리는 박주가리의 지혜가 놀랍기만 합니다. 춥다, 덥다, 마음에 든다, 아니다. 뭔가 불편하다는 둥 아웅다웅 다투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종(種)과는 달리 의연하게 자연의 순리 따라 대처하며 살아갑니다. 지구상에 훨씬 먼저 태어난 지구살이 대선배답게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식물의 생존 지혜를 볼 적마다 감탄이 절로 우러납니다. 호호백발 은빛 머리칼을 파란 하늘 아래 날리며 멀리멀리 새 삶터를 찾아 나서는 여행길, 박주가리 씨앗의 새 여정이 무사하기를 빕니다.

(2023. 2월 겨울바람에 날리는 박주가리 씨앗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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