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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보면 아는 게 포르노뿐일까?
정숭호 2023년 01월 31일 (화) 04:09:12

따지지도 묻지도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사실을 “척 보면 압니다”라고 합니다. 왕년의 코미디언 황기순이 1987년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척 보면 압니다”는 금세 그 무렵을 대표하는 최신 유행어가 됐으며, “안 봐도 비디오!” 같은 이복동생을 낳았습니다. 

만약, 미국 사람과 영어로 이야기하다가 “척 보면 압니다”라고 하고 싶을 때는 뭐라고 하면 될까요? “I Know it when I see it”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연인들(Les Amants)’이라는 1958년 작 프랑스 영화가 있습니다. 올해 나이 일흔에서 여든 전후이면서 왕년에 영화 좀 보신 분들은 이름이 낯설지 않을 잔 모로라는 당대의 ‘불여우'-한자로 쓰면 佛女優-가 주연한 영화인데, 간통을 저지른 한 여인이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내용이랍니다. ‘찐한’ 장면이 좀 있었는지 이 영화가 미국에 수입되어서는 외설물 시비, 즉 포르노냐 아니냐를 두고 난리가 났답니다.

검찰이 영화 수입업자에게 벌금을 물리자 수입업자는 정식 재판을 걸었고 그리하여 이 문제는 연방대법원에 올라갔는데, 사건을 담당하신 고매하신 포터 스튜어트라는 대법원 판사님이 따로 이 영화를 보시고는 “이거 포르노 아니야. 내가 척 보면 알아! (I know it when I see it, and the motion picture involved in this case is not that)”라고 말씀하셨답니다. 판사님 이 말씀으로 이 문제는 끝이 났지요. 그게 1964년이었는데, 이 이상 명쾌한 판결이 있을 수 있나 싶습니다. 

진짜 그렇잖아요? 포르노인지 아닌지 척 보면 아는 거지, 장면 장면 숨소리 말소리 이 모든 걸 하나하나 앞뒤로 되풀이해 보면서 따져야 아나요? 예술인지 외설인지, 말 그대로 척 보면 다 아는 거 아니겠어요? 하지만 세상에서 척 보면 알 수 있는 게 포르노만은 아니지요. 매우 많은 사람, 매우 많은 사물과 사건은 자세히 안 들여다봐도 척 보면 아는 것들 아닌가요? 그래서 스튜어트 대법관님의 명언은 포르노를 볼 때만 쓰이는 게 아니라 뭐든 “안 봐도 비디오!”인 상황일 때는 사람들이 무시로 사용하는 관용어-유행어가 아니라-가 됐다고 합니다. 

내친김에 “척 보면 압니다”의 뿌리를 ‘역사적, 유전적, 진화적, 철학적’ 측면에서 찾아봤습니다. 요약하면, 관련 연구자들은 이 말을 ‘직관(直觀)’이라고 하는군요. “감각기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이라는 길고 어려운 설명이 붙어 있지만 줄이면 “척 보면 압니다”, 이 여섯 글자에 다 압축됩니다. “직관은 논리적이 아니기 때문에 위험하다, 오해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라고 하지만 한 인간이 평생 살면서 내리는 판단의 99.99999…% 는 직관으로, 즉 “척 보면 알기 때문에 내려지는 것”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불은 뜨겁고, 호랑이는 무섭고 …. 수십만 년 인간이 경험해온 것들의 통계이자 확률이 몸에 밴 것이 직관이라고 하니 한국에서는 “척 보면 압니다”가, 미국에서는 “I Know it when I see it”이 유행된다고 해도 이상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들어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아시다시피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한 한 인간에 대해 그가 죄를 지은 게 확실하다고 추정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어떤 사건이 드러났는데, 그 사건의 주인공에 대한 선입관, 그 사건에 대해 주변에서 흘리는 말만 토대로 유죄네 무죄네 하지 말라는 거지요.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어떨 때는 그 사건의 흐름과 사건 주인공의 평생의 언행이 포르노처럼 척 보면 알 수 있는데도 이 원칙을 들이대면서 오히려 남에게 덮어씌우거나 괴상한 논리-사실은 억지, 궤변, 망언-로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 답답한 걸 넘어서 분노가 치솟기도 합니다. 

그 사람 주변에서 그의 망동을 부추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얼 노리고 저러는가, 바보들은 아닐 텐데 왜 저러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척 보면 아는데, 저들이 저러는 건 정말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무죄라면, 천지신명에게 고하노니 억울한 누명이라고 믿는다면 조사에 말 그대로 당당히 임하면 될 터인데, 지지자들만을 향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하고 있으니 믿을 수 없는 겁니다. 

쓰다가 보니 "공직에서의 도덕적 진지함은 포르노그래피와 같다.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보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영국 출신 사학자 토니 주트가 자서전 '기억의 집'에 쓴 건데, 그에 따르면 "도덕적 진지함은 뜻과 행동의 일관성, 즉 정치적 책임의 윤리"입니다. 스튜어트 판사의 명언을 살짝 비튼 것 같은 주트의 말은 뜻과 행동의 일관성이 없는 정치인을 포르노 배우에 비유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너무 나갔나요?

(제 글 끝에 나오는 '그 사람'과 '그 사건'이 뭐냐는 안 밝혔습니다. 척 보면 다 아실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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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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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석 (122.XXX.XXX.87)
무죄 추정의 원칙, 척 보면 안다. 좀 배운 것 같은데 나이를 먹으면 다 이렇게 판단이 흐려지는걸까? 자기는 전지전능한 판단만을 하는 심판인 양 착각하는 사람같지 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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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1 09: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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