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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새, 아비정전(阿飛正傳)
김창식 2023년 01월 05일 (목) 02:14:28

해가 바뀌면 소원을 빌거나 각오를 다지기도 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군요. 그저 큰 탈 없이 건강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지난해는 돌이키기도 싫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야 일상이 되었으니 그렇다 치고 신물나는 여야 정쟁,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 고물가‧고금리‧고환율, 이태원 참사 등등.

정치, 사회, 오피니언, 전면광고는 대충 건너뛰고 대중문화를 살펴보면 작지 않은 위안을 얻습니다. 가요(BTS, 블랙핑크)와 영화(기생충), OTT 드라마(오징어게임) 할 것 없이 어지간한 문화 콘텐트들이 앞에 ‘K'를 달고 세계를 주름잡고 있군요. 그런 현상이야 당연히 흐뭇하지만 나이 탓인지 한 시절을 풍미했던 홍콩영화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홍콩영화는 1960년대 한국의 영화 팬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친 무협영화와 1970년대 쿵푸영화 이래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지만 1990년대 들어서며 누아르 장르를 앞세운 영화들이 한국 관객들을 강타했습니다.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 <첩혈쌍웅>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에요. 다른 한편 왕가위(王家衛, 1958~) 감독의 영화들이 잠언 같은 대사, 시적이고 유려한 화면으로 팬덤을 형성했고요.

<아비정전(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 1991)>은 <중경삼림(重慶森林, 1994)>과 함께 왕가위 감독 팬들이 신주처럼 모시는 영화입니다. 줄거리를 살펴볼까요.

‘영화는 자본주의와 고도의 물질문명이 진입하기 전인 1961년 홍콩의 허름한 뒷골목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아비(장국영)는 체육관 매점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옥)과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아비에게 여자는 그저 지나가는 파트너에 지나지 않는다. 아비는 수리진을 버리고 순정파 댄서 루루(류가령)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비는 루루마저 버리고 생모를 찾아 홍콩을 떠나려 한다. 아비가 필리핀으로 가기 위해 가짜 사증을 구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일고 패거리들과 격투를 벌인다. 경찰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아비는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총에 맞아 죽는다. 한편 홍콩에 있던 루루는 필리핀으로 아비를 찾아오고, 수리진은 아비를 잊은 채 예전처럼 일을 한다.’ -두산백과

<아비정전>은 왕가위가 <열혈남아(熱血男兒), 1988>에 이어 두 번째로 감독한 작품입니다. 젊은 날의 방황과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망, 엇갈리게 마련인 인연과 사랑의 허망함을 묘사한 영화예요. 왕가위 특유의 공간의 폐쇄성과 정지된 듯한 화면, 부감(俯瞰)과 사선으로 찍는 카메라 기법이 돋보입니다. 과거형 내레이션과 왜곡되고 파편화돼 실체가 없는 환상처럼 느껴지는 화면이 특징이기도 한 이 영화를 '시적(詩的)인 영화의 대표'처럼 회자되게 한 이유는 무엇보다 '발 없는 새'에 관한 아포리즘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오는데 그건 죽을 때라지." 
아비(장국영)가 루루(유가령)와 '원 나잇 스탠드'를 하며 읊조리는 대사입니다. '죽을 때 단 한 번 땅에 내려오는 새'가 상징하는 것은 상처 입은 순수한 영혼이니 영화 속 아비의 모습과 닮았군요. 왕가위 감독은 '발 없는 새' 이야기를 아비의 입을 통해 더욱 심화(深化), 변주합니다. 
"발 없는 새가 태어날 때부터 바람 속을 날아다니는 줄 알았지. 근데 그게 아니었더라고. 그 새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던 거야."

혹시나 하고 집 주변이나 산책길을 걸으며 유심히 관찰했는데 ‘발 없는 새’는 보이지 않더라고요. 대신 날개 한쪽이 없는 까치는 보았습니다. 그 까치는 허공을 날지는 못하고 뒤뚱뒤뚱 걷거나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다니는 것이 고작이더군요. 그런데 요 며칠은 그 까치가 보이지 않아요. 이 겨울 날씨도 추운데 무탈하게 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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